회사 내 관계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나저씨님께,
12월의 첫날이 밝았습니다. 25년 달력을 벽에 처음 걸어두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마지막 장만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어제는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마지막 회를 봤습니다. 자신을 옭아매던 자존심과 족쇄를 스스로 알아보고 내려놓은 뒤, 김 부장이 짓던 그 표정이 오랫동안 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더군요. 그러면서 예전에 나저씨님이 들려주신 회사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직장 내 인간관계에서 좀 자유로워지고 싶다”라고 하셨지요. 능력에 비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상급 협력사 실무진에게 무시당하는 순간들이 쌓여서 버티기 힘들다고 하셨던 말도요.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알아서, 그냥 흘려듣기가 어렵더라고요.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회사에서 인간관계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조금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저는 이제 “인간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방법” 같은 건 회사 안에서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회사가 결국 “일”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과 부딪히는 공간이라면,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건 회사를 다니는 한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편지에서 제가 드리려는 말은 “이렇게 하면 인간관계가 편해진다”라는 해결책보다는, “환경을 바꾸지 못한다면, 그 안에서 나를 어떻게 바꿔볼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저도 회사 기준으로 보면 성공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중요 보직을 맡지도 못했고, 한때는 바라던 해외 지사 파견 기회도 번번이 놓쳤습니다. 30대, 40대 내내 보직 한 번 맡아보려고, 해외 한 번 나가보려고 꽤 애를 썼는데 결과는 늘 비슷했습니다.
어느 순간 회사가 내린 결론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이 사람은 기준에 못 미친다.” 말로 하진 않지만, 분위기와 결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요. 처음엔 정말 화가 났습니다. ‘내 능력을 제대로 써볼 기회도 안 주면서 왜 날 판단하지?’ 억울함과 분노, 자기 연민이 뒤섞인 시간을 꽤 오랫동안 보냈습니다. 그리고 원망하는 감정의 칼끝은 “날 알아봐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향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버티던 어느 날, 우연히 지인이 글을 같이 써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습니다. 회사 일도 벅찬데 무슨 글이냐 싶어서 처음에는 완곡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런데도 친구가 몇 번이고 설득을 하여, 마지못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사실 제 인생이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힘들게 회사 다니던 현실은 그대로였고, 직급도 안 바뀌고, 월급도 그대로였습니다. 하지만 변화는 책이 세상에 나온 다음에야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친구와 함께 쓴 책이 예상보다 많은 관심을 받게 되면서, 강연을 하거나, 소규모 모임에 초대받고, 작은 커뮤니티에 참여할 기회들이 열렸습니다. 여기서 제 인생이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회사 사람들만 만나던 제가, 회사 밖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회사 밖에서 만난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정해진 승진 트랙에서 벗어나 자기 일을 만드는 사람, 지방 소도시에서 조용히 가게를 운영하며 사는 사람, 대기업을 그만두고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까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회사를 기준으로 봤을 때 실패한 인생”이, “인생 전체로 봤을 때 실패”는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내가 붙잡고 있던 기준이 너무 좁았다는 걸요.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만 있을 때는 “나를 알아봐 주지 않는 상사, 나를 무시하는 상대방”이 세상의 전부처럼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평가에 휘둘릴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회사 밖 사람들을 만나고, 나를 직업이나 직함으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니, 이상하게도 회사 안 인간관계에 덜 매이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예전에는 이런 생각을 하루에도 열두 번씩 했습니다. 하지만 회사 밖에서 나를 온전히 존중해 주는 사람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들이 생기고 나니 회사에서의 시선이 인생 전체를 좌지우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런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회사에서 받았던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사실 ‘나’로 있을 수 없어서 생긴 것이었구나'라는 깨달음을. 회사 밖에서 나를 지지해 주는 관계가 생기자, 회사 안에서도 조금씩 ‘나’로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건, 회사 안 환경은 하나도 안 바뀌었는데 제가 받는 스트레스의 양이 확 줄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나를 판단할 권한을 회사에 100% 넘기지 않게 되자, 회사 내 인간관계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수많은 관계 중 하나”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조심스럽게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회사에서 인간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회사 안 관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회사 밖에 나를 지탱해 줄 다른 관계와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고요.
저에게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방법은 커뮤니티 활동이었습니다. 꼭 거창한 모임일 필요는 없습니다. 동네 독서 모임일 수도 있고, 작은 스터디일 수도 있고, 취미를 나누는 소규모 모임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회사와 전혀 다른 기준으로 사람을 만나보는 경험입니다. “직급이 뭐냐”보다 “어떻게 살아왔냐”를 묻는 자리, “어디 다니냐”보다 “무엇이 좋으냐”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나 자신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정답이 하나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회사 인간관계는 더 이상 절대적인 문제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냥 여러 문제 중 하나가 되었고, 그렇게 회사 안 인간관계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저도 지금 당장 인간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 정답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회사 밖에서 나를 지켜줄 작은 세계를 하나 만들기 시작하면 회사 안에서의 숨이 조금씩 트이기 시작한다는 것만은 경험으로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 게 겨울이 다가오는 게 느껴지네요. 2025년도 한 달 남은 시점에, 나저씨님도 올 한 해를 돌아보시고, 새로운 자신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라봅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