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을 쭉 떠올려볼 때, 친구, 지인, 직장동료, 각종 모임 등. 내 기억에 유달리 오래 남는 사람들은 여성들이었다.
나는 학창 시절부터 동성 친구를 곁에 두길 좋아했다. 이성과 함께 있으면 늘 불편한 공기가 흘렀고, 여자들을 훑어보는 시선이 싫었고, 언어나 행동이 폭력적이고, 점심시간엔 늘 축구를 해서 땀냄새가 심했다. 이성과 조금이라도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면 서로 좋아하냐는 놀림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런 시선과 놀림이 나에겐 제일 당혹스러운 일들이었다. 나는 그저 재밌어서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었고, 한 번도 이성을 좋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시선들이 싫어서 점점 더 이성을 멀리하게 되었던 것 같다.
같은 여성과 같이 있으면 나로서 그저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어 좋았다. 이성들의 폭력에 노출되지 않는 편한 공기가 좋았고, 깊은 내면까지 이야기해도 거리낌이 없을만큼 가까웠다. 하지만 그때는 서로 어렸던 시기여서 늘 서로의 외모를 재단하고, 무리에서 따돌림당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던 아슬한 분위기가 있긴 했다. 그럼에도 나는 동성 친구들과 어울리길 더 좋아했다. 하루종일 붙어서 이야기를 나누어도 서로 좋아하냐고 놀리는 이상한 시선들이 없었다. 나에겐 동성 친구들 간의 관계들이 안전하고 편안한 울타리였다.
하지만 여성들과의 관계가 모두 순조로웠던 건 아니었다. 나의 우주를 나눌 만큼 마음을 주었던 친구는 사이가 틀어져서 다신 볼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힘들었던 스타트업 회사생활에 늘 붙어 다니던 동료와는 서로의 입장과 생각이 극명히 달라져서 서서히 멀어졌다. 사람 관계라는 게 카테고리로 우정 혹은 사랑으로 딱 딱 나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다양한 사람을 통해 알게 되었다. 깊은 생각과 미래의 이야기를 몇 년 동안 나눴던 친구는 한눈에 반한 남자 애인과의 고작 몇 주간의 관계에서 내가 밀려나게 되었을 때 당혹감이 밀려왔다. 나는 지금 동성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과의 관계는 '우정'이라는 카테고리로 나누기엔 매우 복잡하고, 형태로 표현하기엔 쉽게 그려낼 수 없는 이 관계를 왜 같은 성별이라는 이유 만으로 얕고 쉽게 바슬러 질 것 같은 카테고리로만 나눠두었을까.
여성주의자로 나를 수식하고 나니 그런 여성들과의 관계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성애가 주류인 이 세상에서 여자와 남자와의 '사랑'만이 완벽하고 아름다운 관계로 정의되는 것, 여성의 '우정'은 하위로 규정되어 어리숙하고 잠깐 스치는 것으로만 정의되는 것이 기이함을 느꼈다. 나는 나를 좋아한다고 잠깐 따라다녔던 남자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정말 좋아했던 친구와 싸우고 헤어졌을 때는 몇 년 동안이나 상흔이 남아 극렬하게도 미워해보고, 그럼에도 그리워해보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가도, 망했으면 좋겠다는 음습한 마음이 일어나다가도, 여성혐오로 점철된 이 시대에 너만큼은 안전하고 잘 이겨냈으면 좋겠다는 감정이 들었다. 이런 복잡한 감정을 고작 사랑과 우정으로 나눌 수 없고, 성별로 나눠 분류할 수 없다.
우정이라는 카테고리로 나누기 어려운 여성들에게. 우리들의 관계가 다채롭게 표현되는 세상이었다면 우린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어떤 일상을 나누었을까. 우린 단지 남자를 만나기 전 여자 아이들이라 어리숙하게 스치는 관계가 아닌 주체적인 관계였을 것이고, 사랑의 하위가 아닌 동등한 관계였음을. 그랬다면 나도 그런 관계들을 쉽게 지나치지 않고 더 싸우며 너와 부딪치며 다시 화해했을 건데. 나의 삶도, 너의 삶도 이젠 더 이상 성별로 분류당하지 않고, 사회의 규범으로부터 벗어나 더 자유롭고 다채로운 주체적인 관계를 맺는 삶을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