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기사가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본 세상만사
시집가는 자두나무
이야기 여덟
시집가는 자두나무
고재동(시인ㆍ택시 기사)
딸을 시집보내는 부모 맘이 이럴까? 바람 불고 첫얼음까지 언 소설小雪 날, 먼발치에서 떠나가는 나무들을 물끄러미 본다. 키만 머쓱하게 자라 볼품없는 자두나무는 우리 집에 온 지 8년 만에 제 살 곳, 제2의 고향으로 팔려 간다.
귀촌한 이듬해 7, 8백여 평 밭에 자두나무 170여 그루를 심었다. 그 후 2, 3년 간 관리를 하였다. 서툰 솜씨지만 가지치기도 하고 수형을 잡아 주고 나무를 만들려고 애를 썼다. 첫 수확을 할 때까지는 좋았다. 비록 어디 내다 팔아 돈과 바꿔 오지는 못했지만 지인들과 풍족하게 나눠 먹는 재미는 있었다.
애들이 자라면서 내 맘대로 할 수가 없었다. 애들이 내 말을 듣질 않았다. 제멋대로 키가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고. 내 아이지만 내가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들판에 제멋대로 뛰어놀게 두었고 결국 애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고 말았다.
봄이면 꽃만 화려하게 피었다가 열매를 단다. 농약을 전혀 뿌리지 않으니 제대로 익기도 전에 땅에 열매를 떨구기가 일쑤였다. 키만 하늘을 찌를 듯 머쓱하게 자라 재작년 태풍에 여러 자식이 비스듬히 누웠었다.
이 지경에 이르자 주위에서 나무를 정리하고 다른 작물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조언을 해 오기도 했다. 엄두가 나지도 않았고 아무리 뿔난 망아지로 키웠지만 내 자식을 땔감으로, 파쇄기로 부숴버릴 수가 없었다. 때마침 인근에 사는 나무를 전문으로 하는 상인이 와서 팔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염가로 쳐서 주면 필요로 하는 곳에 보내 잘 키워보겠다고 했다. 나쁘지 않은 제의를 받고 떠나보내는 마음은 아팠지만 좋은 곳에 가서 잘 살 수만 있다면 이 얼마나 좋은가 싶어 그리하기로 했다. 업자가 제의하는 가격에 자두나무를 넘겼다.
야금야금 데려가다가 하필 오늘같이 추운 날 많은 인부와 함께 와서 대대적인 작업을 하고 있다. 시내에서 아내와 함께 들어오다가 그냥 먼발치에서 떠나는 자두나무를 바라만 봤다. 아내도 관심이 없는 건지 가까이 가서 배웅하지 않는다.
한숨 자고 일어나 저녁나절 빈 밭에 가봤다. 아직 데려가지 않은 나무도 몇 남았지만 허허로운 밭을 보며 묘목으로 데려온 때를 회상하며 감회에 젖는다. 잘 키워 평생 같이하지 못한 미안함에 마음이 숙연하다. 그러나 내가 더는 잘 키울 능력이 부족하여 시집보내 잘 살아주면 좋을 것이란 희망이 있어 위안이 된다.
이곳 선돌길 언덕에 귀촌한 후 세 아이를 시집보냈다. 떠나보낼 때 기분은 좀 그랬지만 각기 제자리로 가서 자리 잡고 잘 사는 모습을 보는 지금은 애틋함은 적고 흡족함에 저울추가 기울어 있다. 떠나는 자두나무 내 아이들도 나보다 훌륭한 새 주인을 만나 잘 사는 모습 보는 몇 년 후 흐뭇한 맘을 미리 헤아린다.
보름 전부터 닭집 문을 개방하여 방목한 닭들이 자두나무 보금자리를 잃고 딸기나무 밑에 오도카니 모였다. 갑자기 닥친 추위에 그들도 옹기종기 모여 체온을 공유하며 어차피 다가올 겨울을 매만진다. 추위를 닦을 채비를 한다. 이젠 배춧속 꺼내 먹는 것도 시들한 모양이다. 방목한 닭 네 마리는 처음엔 배추 먹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귀할 땐 껍질도 잘 먹더니 흔한 배추밭에 들어서는 속만 꺼내 먹는다. 나이가 들어 할머니 닭이 되고 보니 부리가 시원찮아 보드라운 속만 오목하니 와인 잔처럼 꺼내 먹곤 하던 닭들이다.
아내에겐 닭 방목한 사실을 비밀로 했다. 닭이 밖에 나와 배추를 쪼아 먹는 사실을 알면 가두라고 할지도 몰라서 알리지 않았다.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기도 했다.
배추를 300포기나 심었다.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추수 때는 감당이 안 된다. 기껏 일 년에 먹어 봤자 10분의 1인 서른 포기도 못 먹는다. 아이들, 지인과 나눠 먹어도 봄엔 창고에서 짓 물어진 배추가 남는다. 그 배추의 추수를 덜어주는 닭이 고마울 뿐이다. 그런데 이즈음엔 배추 맛도 닭에겐 달지 않은 모양이다. 배추 부침개를 해 먹어도, 된장에 찍어 먹어도 달기만 하던데...
신문사와 연락이 닿지 않아 다음 주에 발행하는가 싶어 연재 글을 쓰지 않고 있다가 담당 국장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정상적으로 신문 제작이 된다고 하여 부랴부랴 글을 쓰다 보니 갈팡질팡한다.
해가 기울자 할머니 닭들은 닭장으로 간다. 나처럼 갈팡질팡 하지 않고 종종 할머니라고 볼 수 없을 만큼의 걸음걸이로 저들 집으로 간다. 닭 다리가 성한가 보다.
참새 놀다간 자리에
김이 모락모락
이밥 같은
흔적 남겨 두었네
내년 봄 씨앗 심을 곳
콕 찍어 두고 떠나는
그녀를
모습 지켜보던
붉은 산이 와락 안는다
--<귀촌ㆍ27>
오늘 새벽에 탔던 여자 손님은 단골까지는 아니지만 서너 번 내 차를 이용한 손님이다. 새벽 2시 45분쯤 A 사거리에서 콜이 들어오면 그녀가 맞다. 그녀는 닭발 뼈 분리 작업하러 닭발 공장에 일하러 가는 길이다.
"안녕하세요, 오늘 상당히 춥지요?"
명랑한 목소리의 그녀는 오늘도 먼저 인사를 건네 온다.
"네, 어서 오세요. 저는 차 안에 있어서 추운 걸 잘 모르겠는데 밖엔 꽤 춥지요?"
"저도 하나도 춥지 않은데요. 옷도 껴입었고요, 추울 사이도 없어요. 기사님, 제 가는 곳 아시죠?"
"아다마다요. 거기 닭발 공장 가시잖아요. 잘 모시겠습니다."
"저는 여름 겨울을 가리지는 않지만 여름보다는 겨울이 좋아요. 겨울이지만 추울 겨를이 없거든요. 여름엔 모기가 싫어요. 그 모기..."
잠시 말끝을 흐렸지만 금세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오늘도 당당하고 명랑했다.
새벽 시장이 활기가 넘친다. 게으른 사람한테 새벽 시장에 가보라고 했다. 활기도 넘치지만 사람들의 표정도 밝다. 희망이란 긍정어가 얼굴에 쓰여 있다. 그녀는 명랑한 단어 하나를 더 안고 간다. 매일 가는 길에 여러 택시를 만나 명랑하고 활기 넘치는 에너지를 주고 간다.
그녀는 8년째 닭발 공장에 간다고 했다. 손가락을 베어 일곱 번이나 꿰맸다. 거의 쉬는 날이 없다. 이젠 베테랑. 새벽 3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 15시간 일한다고 했다. 내가 밤새도록 버는 돈보다 더 벌겠다고 했더니 긍정도 부정도 않는 것이 곧 긍정인 듯했다. 벌써 집은 마련했고 주위에서 빌딩을 사겠다고 한다면서 쾌활하게 웃는다. 그녀가 먼저 말하지 않은 부분이어서 가족 관계에 대해선 아직 물어보지 못했다.
"안녕히 가세요. 오늘도 파이팅!"
"사장님도 파이팅! 안전 운전하세요."
그녀를 내려주고 겨우 손님 한 분을 더 모셨다. 단계적 일상 회복, 위드 코로나를 선언하고 1단계. 안개가 자욱하다. 앞으로의 코로나의 시국도 캄캄하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도 안개가 핀다. 바람이 분다. 안개가 요리조리 바람을 밀친다. 바람도 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한다. 이 세상은 안개와 겨울바람의 싸움인가?
그래도 닭발 공장은 돌아가고 우리 집 자두나무는 시집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