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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동 Apr 28. 2022

택시 기사가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본 세상만사

호랑이와 고양이

이야기 열

         호랑이와 고양이

                   고재동(시인ㆍ택시 기사)


  첫눈이 내리고 열흘 뒤 두 번째 눈과 세 번째 눈이 하루 사이로 다녀간 후 보름이 지났다. 올겨울 들어 네 번째를 장식할 눈은 언제쯤 얼마큼 올까? 그사이 해도 바뀌었다. 민감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은 첫눈만 기억하고 두 번째 눈을 기다릴지도 모른다. 오늘도 조금 흐리기는 하지만 눈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강원도 스키장에서 1박 한 큰딸아이네가 새해 들어 처음 어제 집에 왔다. 회관에 마실 간 아내를 데리러 서로 가겠다고 다투다가 딸아이보다 내가 한 발 앞서 나섰다.

  뱉은 말도 주워 담을 그릇이 별로 없지만 남긴 글은 도저히 지울 수가 없다. 활자로 생산된 글은 아무리 강력한 지우개가 나온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마음속에 새긴 단어들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심산유곡, 백옥같이 내려 쌓인 눈처럼 하얗게 지울 힘은 사랑이다. 눈은, 유곡幽谷은 물론 흉가도 덮을 만큼 위력을 가졌나 보다. 백지, 조건 없는 사랑이라 쓴다.

  제 할머니가 차려 내놓은 점심을 먹고 난 준이와 솔이가 닭장 가는 나를 따라나섰다. 점퍼로 무장한 아이들이 빈 고추밭을 가로질러 앞서거니 뒤서거니 닭장을 향한다. 내가 뒤따랐다. 네 마리 닭들은 아이들의 등장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내가 들고 온 모이에만 신경을 쏟는다.

  "할비, 달걀은 없어요?"

  준이가 지난 기억을 소환한다.

  "응, 추워서 달걀을 거의 낳지 않아. 지난가을에 몇 개 낳기는 했는데 할머니가 다 되어 앞으로는 달걀을 낳을 수가 없을 거야, 아마."

  이틀에 한 번 오는 주인이 야속할 법도 한데 닭들은 닭장 안에서 유유자적 건강미를 뽐낸다. 반지르르 윤기가 난다. 할머니라 하기에는 너무나 건장하다.

  자두나무 주변에서 솔이가 막대기를 주워 오다가 넘어졌다. 툭툭 털고 일어났지만 도깨비바늘이 습격했다. 어디든 따라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이게 뭐예요?"

  "황토흙인데..."

  "황토색은 이보다 더 진한데요?"

  저 고모를 닮아 미술에 재능을 보이는 준이는 황토 벽돌이 비에 풀어져 흙으로 돌아가려는 걸 보고 할아버지와 게임을 벌인다.

  "황토색 물감도 있어?"

  "그럼요."

  "그렇구나."

  황토색 물감이나 크레파스가 있었던가, 싶다. 살 색, 분홍색 정도는 기억이 있지만. 손자한테 한 수 배웠다.

  "할비, 이 색이 황토색이에요."

  아직까지 미완성인 황토집 우초제로 쪼르르 달려가며 준이가 벽을 짚었다.

  "정말이구나. 이 색이 정확한 황토색이란 말이지?"

  우리를 뒤따라온 솔이가 마루에 올랐다가 막대기에 걸려 구르고 말았다. 순간적이었다. 댓돌에 떨어졌다가 자갈 마당으로 굴렀다.

  "솔아, 괜찮아?"

  오빠가 먼저 걱정한다. 내가 순간적으로 뛰어내려 일으켰지만 울음보를 터뜨린다. 가볍게 굴러 상처는 나지 않았다. 금세 울음도 그쳤다. 다행이다.

  점심 먹고 간다던 아이들이 저녁 시간이 다 되어 대구로 떠났다. 저녁 먹고 가라는 엄마, 회관에 마실 못 가게 한 게 미안하다며 서둘러 짐을 꾸렸다. 채워졌던 공간은 다시 비워졌다. 짧게 부풀었다 빠진 풍선의 바람은 후줄근한 공간을 남겼다.

  아내는 무엇보다 부녀간의 화해가 고맙고 고맙다고 했다.



  엄동, 서릿발 딛고 그니 보며 실눈 뜬 복사꽃을 술렁이는 화폭에 찐하게 덧칠한다 구겨진 밤을 머리에 얹고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온 그니는 시침 떼고 두리번두리번 흐트러진 별자리 멍하니 본다 나무가 벗기로 작정한 것은 겨드랑에 땀띠가 나서만은 아니다 표피 속 알몸이, 보채는 아가 귀 열어 뒹구는 잎새의 서걱대는 절규 함께 듣기 위함이다.


  편도 2차선 도로 가로질러 생쥐 한 마리 칠흑의 장막을 떠밀며 황급히 지나간다 잠자는 길고양이 수염을 건드렸기 망정이지 술 취해 몽롱한 차바퀴에 운명을 내맡길 뻔하지 않았던가 병원 근처 포도 위로 너울에 의한 물결이 출렁인다. 오늘도 펑펑 눈이 올 조짐은 없다 그러나 그니는 실성한 하늘 향해 실눈을 뜬다. 그래도 봄은 저만치에서 복사꽃 담고 서서히 오고 있는걸.

               --<겨울, 초승달>



  저녁 8시에 방영하는 드라마까지 시청하고 나서 일터에 나섰다. 9시에 마감한 식당이고 보니 거리는 황량하다. 더군다나 일요일 밤인지라 그 정도가 더하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옥동 A 아파트에서 콜을 받았다. 단아한 여자 손님은 한두 번 모셨던 분이었다.

  "미안해요. 엘리베이터를 놓쳐 버렸지 뭐예요. 이 시각에 엘리베이터가 움직여서 깜짝 놀랐어요. 기다렸다가 내려와 보니 어떤 아저씨가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더라고요. 그 길고양이는 딸내미 위층 아주머니가 돌보던 고양이가 틀림없어요. 무늬를 보면 알 수 있거든요. 그 아주머니는 혼자 산다고 했는데..."

  "고양이는 영민해서 함부로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아요. 고양이와 친해지자면 꽤 오랜 시간 먹이를 주고 사랑도 필요해요. 결혼한 따님이 계세요?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요?"

  "벌써 할머니인걸요. 손자를 봐주고 오는 길이에요. 제가 결혼을 빨리하긴 했지요."

  "인사치레가 아니고 정말 할머니로 보이지 않아요."

  호랑이 해에 고양이로 인해 손님과 소통이 되었다. 지난번까지는 인사를 나눈 것 외엔 대화가 없었던 거로 기억된다.

  "저와 옆집은 강아지를 키우는데 함께 저희도 길고양이 한 마리를 돌보고 있어요. 그런데 1월 1일 날 새끼 세 마리를 데리고 왔어요. 얼마나 귀엽던지요. 그런데 새끼 한 마리가 행동이 굼뜨고 기침을 해서 동물병원에 데려갔더니 기관지가 나쁘다고 해요. 지금 치료 중이에요."

  "그 고양이가 복덩입니다. 새해 초하루 날 고양이 새끼 세 마리는 복덩이가 굴러온 거예요. 틀림없이 복 받으실 겁니다."

  고양잇과 호랑이의 해 첫날 새끼 고양이 탄생은 축복이다. 우화에 등장하는 호랑이가 선행하듯이 올핸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 있겠다고 말하려는데 짧은 그 손님의 목적지는 금세 도래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 했다. 그럼 부모와 자식 간의 다툼은 '눈에 발자국 내기 정도'라면 맞을까? 아무리 겨울이라고 해도 눈은 곧잘 녹는다. 강 추위가 이어진다 해도 계절을 누를 수는 없다. 대부분 겨울에 내린 눈은 겨울에 녹지만 발자국에 찍힌 곳은 더디게 녹거나 봄이 와야 녹기도 한다. 미세 먼지야 어쩔 수 없고 오늘처럼 훈풍이 불면 발자국에 눌려 꽁꽁 얼어버린 눈도 녹지 않고 배길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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