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헬브룬 궁전
비가 제법 내리던 여름의 어느 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외곽에 위치한 헬브룬 궁전을 찾았다. 궂은 날씨에도 우리를 비롯한 전 세계 관광객들이 모여든 이유는 '트릭 워터 분수'를 보기 위함이다. 트릭 분수에서 쏟아지는 물과 내리는 비가 뒤 섞이니 우중충한 날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진다.
정원을 둘러보며 비밀스럽게 배치한 트릭 분수의 깜짝쇼를 열심히 보던 중. 앞서 나가던 6살 아이가 갑자기 이야기한다.
"아빠, 저 인형들이 막 움직여!"
정원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작은 바로크 양식의 건물. 겉보기엔 평범한 인형극장처럼 보였지만 막이 오르자 숨이 멎을 듯한 광경이 펼쳐진다. 100여 개가 넘는 목제 인형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건축공들은 자재를 나르고, 현장감독은 한 손에 술잔을 들고 있다. 푸줏간에는 정육점 인부들이 커다란 소를 해체하고, 이발사는 가게 간판 아래서 손님을 면도해 준다. 심지어 거리 한쪽에서는 곰 곡예사가 곰을 데리고 춤을 추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이 모든 움직임이 전기가 아닌 '물의 힘'만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1750년경 설치된 이 기계인형극장은 단 하나의 물레방아가 수십 개의 톱니바퀴와 기어를 돌려 141개의 인형을 동시에 움직이게 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 신분이 높은 인형은 느릿느릿 적게 움직이고, 노동자 계층 인형은 부산하게 일을 한다. 250년 전의 풍자 정신이 아직도 물레방아 속에 새겨져 있다.
극장이 동작하는 순간 척척 거리는 기계음이 들려온다. 하지만 곧 아름다운 바로크 선율이 울려 퍼지며 소음을 덮었다. 18세기 로렌츠 로네즈거라는 기술자가 기계 소음을 덮기 위해 설치한 자동 연주 장치인데, 물의 압력으로 공기를 불어넣어 약 200개의 파이프로 음악을 연주한다. 빗소리, 물소리, 그리고 오르간 선율이 어우러진 그 순간, 18세기 바로크 시대에 빨려 들어간 것만 같았다.
헬브룬 궁전을 처음 지은 마르쿠스 시티쿠스 대주교는 손님들을 놀라게 하는 걸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야외연회 중 식탁과 의자에서 불쑥 솟구치는 물줄기로 손님들을 흠뻑 적시고, 정원 곳곳에 비밀스럽게 배치한 트릭 분수로 깜짝쇼를 선사했다.
실제로 우리도 정원을 돌다가 갑자기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예상치 못한 분수에 젖곤 했다. 이미 비에 어느 정도 젖어서인지 모두들 웃음으로 받아들였다. 400년 전 한 주교의 장난기가 담긴 분수가 여전히 작동한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
물레방아가 돌며 인형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이자 내가 쓴 졸저인 <AI, 인문학에 길을 묻다>에서 다룬 오토마타 이야기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사실 이런 자동인형, 즉 오토마타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책에서 소개한 12~13세기 이슬람의 전설적 발명가 이스마일 알 자자리는 호수를 떠다니며 4명의 오토마타가 공연하는 자동 음악가 보트를 만들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오토마타를 설계하고 실제로 제작한 기록들이 남아있다. 그가 만든 오토마타는 움직임이 너무나 정교해 일종의 프로그래밍적 설계가 들어갔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나올 정도다.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18세기에는 자크 드 보캉송이 만든 먹이를 먹고 배설을 하는 기계 오리를 제작하였으며, 글을 쓰는 기계인형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헬브룬의 기계 극장 역시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탄생한 걸작이었다.
오토마타에서 현대 AI까지 이어지는 더 자세한 이야기는 책에서도 확인 가능합니다. :)
250년 전 물과 톱니로 움직이던 이 목각 인형들을 보며, 오늘날 전기와 프로그래밍으로 작동하는 로봇과 AI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기술의 양상은 달라졌지만, 어떻게 생명을 모방하고 통제할 것인지를 고민해 온 인간의 호기심과 욕망은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헬브룬의 인형들이 보이지 않는 톱니와 와이어의 프로그램에 따라 정해진 동작을 반복하는 모습은, 현대의 AI도 본질적으로는 인간이 설계한 규칙과 데이터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어쩌면 헬브룬의 자동인형들은 초기형 로봇이고, 오늘날의 인공지능은 고도화된 오토마타라고 불 수 있지 않을까?
기술이 아무리 진보해도 인간의 상상력이 향하는 지점은 결국 하나로 수렴하는 듯하다.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기계를 만들지만, 그 속에 담긴 꿈만큼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개강을 하니 더욱 바쁘네요. 이 글도 올려야지 마음먹은 지는 꽤 되었는데 이제야 올립니다.
무엇보다 지금 작업하는 책이 듀데이트를 넘긴 상황이라 마음도 급하네요. 브런치에는 새로운 글을 올리는 것을 나름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는데 이렇게 가다가는 글을 10월 중순까지는 못 올릴 것 같아서요. 지금 쓰는 책의 교정받지 않은 초고를 조금씩 떼서 올릴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