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속의 불운으로 힘든 일주일을 보냈다.
3월 새 학기가 시작되고 캐묻지 않는 척 무심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학교 생활을 넌지시 물어본다.
늘 돌아오는 대답은 “별일 없어요”.
그래도 새 학기의 학교 분위기나 이것저것 듣고 싶은 마음에 잊지 않고 묻게 된다. 3월 한 달을 보낸 아이가 어느 날은 지나가는 말로
“아이들이 자꾸 결투를 신청하러 와요”. 한다.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결투?? 1:1로 몸싸움을 벌이자는 건가?
아니 무슨 결투…. 살짝 긴장되기 시작했다. 나의 반응이 과하면 안 될 것 같아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결투? 무슨 결투?
아이의 표정을 살피니 심각한 결투는 아닌 것 같아 맘이 놓였지만 아이의 설명이 너무 궁금했다. 아이가 말한 결투는 팔씨름이었다. 아이의 벌어진 어깨와 땅땅한 팔근육을 만져본 친구들의 입소문으로 괴력의 소유자가 있다는 소문이라도 났는지 다른 반에서 힘 좀 쓴다는 아이들이 하나 둘 쉬는 시간에 찾아오는 것이었다.
팔씨름 결투라면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잠시 아이는 은근히 자랑하듯이 말을 보탰다.
“저랑 싸우면 폴더처럼 접힐 거래요.”
“싸움을 잘하게 보이나 봐요.”
그 소리를 듣는 동시에 내 머릿속에서는 온갖 상상들이 펼쳐지고 덩달아 불안한 마음도 커지고 있었다.
동급생들이야 다들 순하고 착한 것 같다는 아이 말이 있었으니 걱정이 안 됐는데 영화나 드라마 속의 삐딱하게 서있는 선배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튼실하고 맷집 좋은 후배가 있다고 소문이 나서 불려 가는 일이 생길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보기에는 파이터로 보여도 2살 차이 동생이랑도 치고받고 싸움도 한번 해본 적 없는 비폭력주의자다.
본인 방에서 애지중지 식물을 키우는 아이의 본모습이 덩치에 가려져 다른 이미지로 부풀려진 아이의
학교 생활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는 아이의 하교 후의 표정이나 매무새를 더 살피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고 일어날 가능성도 희박한 일인데 과하게 신경 쓰고 있는 나를 보면서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학교폭력에 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 탓일 것이다. 내 기준에서 가장 회복이 더디고 피해자와 가족의 상처가 깊은 사는 동안 누구든 겪지 않기를 바라는 불운 중에 가장 상위를 차지하는 불운이다.
합당한 이유도 모른 체 그 대상이 되고 몸과 마음을 다치는 피해 아이들과 앞으로도 끊임없이 생겨날
또 다른 피해자를 생각하며 막막함이 느껴진다. 끔찍한 일을 겪은 아이들 중에 어른의 통제 아래
진심 어린 사과와 보호, 가해 아이들이 제대로 된 계도 과정을 거치는 치유 과정을 겪은 아이들이 존재할까?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는 어떠한 감정적 해소도 자의적인 망각도 불가능할 것이다.
어른을 통해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배우고 일상을 통해 충분히 경험치 못한 아이들은 뒤틀린 마음으로 대상을 고르고 말과 행동으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힌다.
어른이 되어서도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으로 삶을 피폐해지고 나는 분명 어리고 겁에 질린 피해자인데
감정의 방향은 무기력한 나를 향하고 끊임없이 자책하고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온전한 행복을 누리기
힘든 상황을 만든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상처투성이 아이였던 나를 맘 속에 봉인한 채 사는 어른들이
얼마나 많을까?
이런 불안감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제 더 이상 폭력의 희생자도 뉘우침 없는 가해자의 변명도 그만 보고 싶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눈앞에 있는 내 아이부터 타인에게 해가 되는 말과 행동의 절제를 가르치고
가해 아이들은 혹독한 책임을 지우고 그 부모에게도 그에 맞는 책임을 지게 하는 엄정한 제도로
변화되어야 한다.
가해 아이들의 어린 나이와 유려한 반성문 따위에 피해 학생의 지우고 싶은 기억과 아물지 않은 흉터가 덮어지는 일이 없이 상식적으로 변화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일주일은 불길한 상상으로 불안한 시간들을 보내도 지금은 별일 없는 아이의 하루하루가 감사한
엄마의 지난 일주일의 하소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