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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 Mar 23. 2023

나의 봄날

“컨디션 좋으면 한번 오세요.”

“그래, 봄 되면 갈게.”

봄이다. 3월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 꽃들이 피어났다. 봉우리를 한껏 부풀려 세상 밖으로 나갈 때만을 기다리던 목련이 피어났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동안 나는 향수병에 걸린 이방인처럼 학교가 그리웠다. 아니, 그들이, 그들과 함께 했던 그곳이, 그 시간이 너무 그리워 오래 앓았다. 어린 시절 내 소원은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사는 것이었다. 나는 대학생이 되면서 비로소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집 밖으로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내가, 세상 속에서 사는 법을 한 번도 배우지 못한 내가, 스스로 봉우리 밖으로, 세상 속으로 한껏 피어났다.


스무 살 봄날, 목련은 뽀송뽀송한 솜털을 벗고 꽃잎을 활짝 피워냈다. 대학 생활은 즐거웠고 꽃처럼 예뻤다. 쭈뼛거리며 구석에만 얌전히 앉아있던 내게도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준 친구가 생겼다. 게다가 노래도 잘하고 유머도 있으며 키도 크고 잘생기기까지 한, 이상적인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

"사실 나 C랑 사겨."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C와 사귄다고 했다.


내 스무 살의 설렘은 열흘 간 피었다 지는 목련처럼 짧았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짝사랑도 잃고, 절친도 잃은 나는 헤매다 동아리로 숨어들었다. 지하의 어둡고 지저분한 동아리방, 그보다 더 어둡고 칙칙하고 지저분한 남자 선배들과 동기들이 있던 연극 동아리였다. 가입만 해놓고 짝사랑 때문에 가지 못했던 곳을 짝사랑의 시련 후 다시 돌아갔다.


동아리방 계단을 오르면 분장실이 있고 분장실과 이어진 문으로 나가면 소극장 무대가 펼쳐졌다. 무대는 온전히 우리 동아리 차지였다. 우리는 연극 공연을 위해 연습을 했고 동네 여기저기서 주워온 것들로 무대 세트를 만들었다. 휴식 시간, 무대는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누군가는 노래를 하고, 누군가는 춤을 추었다. 그러다 탁구공을 야구공 삼아 무대 위에서 야구를 했다. 처음으로 야구를 배웠고 작은 무대 위에서 나는 공을 치고 달렸다. 나의 공은 언제나 홈런, 집을 떠나 온 내가 홈을 향해 달렸다. 그 무대 위에서 스물한 살의 나는 늘 웃고 있었다. 선배들의 말이 재미있었고, 야구가 신났고, 연극 공연 준비가 즐거웠다. 우리가 있는 곳은 어디든 무대였다. 싸우기도 했고 그러다 울기도 했지만 그들 속에서 나는 반짝반짝 빛났다. 손바닥만 한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공연장이었지만 그곳엔 언제나 꽃이 피었다. 사계절이 봄이었다.


연극 공연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공연을 준비하며 한껏 웃었던 기억은 오래 남았다. 졸업 후 반지하방에서 구인란을 뒤적이며 직장을 구할 때에도 곰팡이 냄새 가득하던 지하 동아리방과 어두운 무대 위 나를 비추던 조명이 떠올랐다.

동아리 건물 앞마당에 기어다니던 공벌레조차도 심장을 뛰게 했던 나의 20대, 대학 시절, 힘들 때면 늘 그때를 생각했다. 무작정 이쁨 받고 사랑받았던, 그 철없이 행복하기만 했던 때, 지금도 나는 그 힘으로 살아간다. 가끔 힘이 들 때면 그곳으로 간다. 그때 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이는 들었지만 철없는 건 그때와 똑같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봄이다. 짐을 꾸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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