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대부분의 중앙은행들은 두 가지 형태의 지급수단을 발행하고 있다. 경제권 내 모든 경제주체들을 대상으로 발행하는 물리적 형태의 현금화폐와 소수의 자격을 갖춘 금융기관(또는 정부)를 대상으로 발행하는 디지털 형태의 중앙은행 예금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현금화폐와 중앙은행 예금이외에도 통화안정증권을 발행하고 있다. 통화안정증권은 환매조건부매매, 통화안정계정 등 여타 공개시장운영수단과 함께 중장기적 유동성 관리 수단으로 주로 사용된다.) 후자의 경우 대표적인 예가 은행들이 주로 중앙은행에 예치하는 지급준비금(Reserves)이다. 최근 전 세계 대부분의 중앙은행들이 연구를 진행하며 발행을 검토하고 있는 소위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줄여서 CBDC)는 구체적인 활용 목적, 설계방식, 운영방식 등은 다양할 수 있으나 공통적으로 현금화폐와 같이 경제 내 모든 경제주체들을 대상으로 발행하는 디지털 형태의 지급수단을 의미한다는데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현재 모든 경제주체를 대상으로 발행되고 실제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는 디지털 지급수단들은 은행, 빅테크기업 등 민간기업들에 의해 공급되고 있다. 이러한 디지털 지급수단은 현금화폐에 비해 다양한 장점이 있다. 예를 들면, 현금화폐와 달리 이들은 온/오프라인 시장 모두에서 사용이 가능하고 소지 및 관리가 편리하다. 이 때문에 디지털 지급수단 사용에 필요한 디지털기기에 익숙한 세대일수록 현금화폐보다는 디지털 지급수단을 주로 사용하는 경향도 두드러진다. 반면 현금화폐는 오프라인 시장에서만 사용가능하며 고연령층이 주로 사용한다.(한국은행 (2022)) 이러한 지급결제 환경에서 중앙은행이 CBDC를 발행한다면 CBDC는 민간발행 지급수단과 경쟁할 가능성이 높다. CBDC 역시 ‘디지털’이라는 동일한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에 민간발행 디지털 지급수단과 수용성, 편리성 등에서는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디지털 형태의 CBDC는 어떠한 측면에서 이들과 차별화될 수 있을까 그리고 차별화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하나의 답으로 고려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개인정보보호, 즉 프라이버시(Privacy) 측면이다. 기존의 현금화폐는 거래에 있어 프라이버시를 제공하는 사회적 기제로서 역할을 수행해왔다. (Kahn et al. (2005)) 현금화폐를 지급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 거래 당사자간 상대방의 신분을 확인할 필요가 없다. 원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얻고 그 대가로 그 자리에서 현금화폐를 건네는 것으로 거래가 마무리된다. 즉, 그 자리에서 지급, 청산 그리고 결제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현금거래는 불필요한 개인정보가 노출되거나 이를 이용한 경제적 또는 비경제적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낮다. 이는 보편적 지급수단중 현금화폐만이 갖고 있는 유일한 특징이다. 이와 달리 디지털 지급수단을 거래에 사용하는 경우 거래당사자들 외에 지급내역을 디지털원장에 기록하고 유지하는 제3자의 개입은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은행예금을 이체하는 것으로 거대대금을 지급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구매자는 판매자에게 은행예금을 이체하기 위해 은행계좌에 본인 확인과정을 거치고 지급지시를 내린다. 지급지시를 받은 은행은 지시대로 디지털원장에 기록된 구매자의 예금잔액을 낮추고 판매자의 예금잔액을 높이는 작업을 수행한다. 구매자와 판매자간 은행이 다를 경우에는 두 개의 은행이 이러한 디지털 원장 기록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현실에서는 두 은행이 지급, 청산, 결제과정 수행하는데 최종 결제는 중앙은행의 결제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현금과 달리 유동성리스크, 운영리스크, 볍률리스크 등 다양한 리스크가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거래와 관련된 개인정보는 디지털기록으로 남게 되고 이 때문에 프라이버시가 침해되거나 개인정보를 활용한 가격차별 등으로 소비자잉여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발생한다.(Garratt and Lee (2021))
CBDC 역시 디지털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에 현금화폐와 동일한 수준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민간발행 디지털 지급수단보다 프라이버시 측면에서 우월하도록 설계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예를 들면 BIS에서 제시한 조각그림 퍼즐원칙(jigsaw puzzle principle)을 적용하는 것이다. 개인거래정보를 여러 개로 조각내어 하나의 기관이 다른 기관들의 정보없이는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설계시 이 지점에서 CBDC가 거래시 현금화폐과 유사한 수준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한다면 불법적 거래, 자금세탁 등에 더 쉽게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또한 CBDC를 발행하는 주체인 중앙은행은 공적기관으로 민간기업과 달리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거나 개인정보를 사익을 위해 사용할 경제적 인센티브가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중장기적으로도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운영방식을 유지하게 하는 것도 수월하다. 따라서 프라이버시 측면에서 CBDC는 여타 디지털 지급수단과 차별화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는 지급수단으로서 안정적인 수요를 확보하는데 필수적인 요소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이러한 CBDC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서비스를 제공하는 새로운 지급수단으로 지급수단의 다양성을 높이고 오프라인에서의 현금화폐와 같이 온라인시장에서도 프라이버시를 보장함으로써 소비자의 후생을 개선할 수 있다. 예를 들면, CBDC는 지급수단간 경쟁을 촉진할 수도 있고 CBDC 사용자가 본인의 거래정보에 대한 소유권을 명확히 함으로써 그 가치를 시장에서 보상받게 할 수도 있다. 또한 CBDC를 통해 생성된 데이터중 일부를 공공재처럼 공유하는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데이터 집중화로 발생하는 자연독점적 시장구조를 개선하는 것도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CBDC는 기존 디지털 지급수단이 갖고 문제점들을 해소함으로써 사회적 후생을 증진시키는 데에 기여할 수 있으므로 설계 시에 프라이버시 측면에서의 차별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참고문헌
한국은행 (2022), [보도참고자료] 「2021년 지급수단 및 모바일금융서비스 이용행태 조사결과」
Garratt, R., & Lee, M. J. (2021). Monetizing privacy (No. 958). Staff Report.
Kahn, C. M., McAndrews, J., & Roberds, W. (2005). Money Is Privacy. International Economic Review, 46(2), 377–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