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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푸른 Feb 19. 2024

남편이 아니꼬운데 쫄았다.

다 세탁기 펌프 때문

우리 집 세탁기 배수로에는 수조가 있다. 수조 안 펌프는 물을 바깥 우수관으로 배출한다. 물이 역류하는 대참사를 몇 번 겪고 남편이 손수 이 방법을 고안했다. 주택에 살면 관리비를 안 내는 대신 온갖 관리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 사람을 쓰면 되기야 하겠지만 이곳은 인건비가 비싼 네덜란드. 이곳 지인이 누수로 업체에게 1000유로를 지불했다는 말을 듣고 더더욱 자체 해결 혹은 미해결을 인생 모토로 삼고 있다. 


몇 주 전부터 세탁기 배수펌프가 굉음을 낸다. 왜 그런고 하니 수위 조절에 오류가 있는 것 같단다. 세탁 배수는 세제 거품이 껴있다. 펌프가 거품을 물로 착각해서 가만히 있어야 할 때 헛 것과 공회전하는 소리인 것이다. 듣다 보면 지 혼자 열내다 터져버릴까 조마조마하다. 임시방편으로 남편은 펌프의 코드를 뽑아버린다. 나더러는 세제 문제인 것 같으니 액상형 대신 캡슐형을 쓰고, 세탁법을 3시간짜리 면 코스로 하란다. 수조를 보면 캡슐형이 거품을 더 만드는 것 같은데. 세 시간 코스가 유량이 적은 것 같다는데 웬 말인지. 건조 세 시간까지 한 나절을 기계음을 듣고 있어야 한다니. 옷감도 상할 것 같고.


남편이 없을 때 하던 대로 세탁기를 돌린다. 굉음이 들린다. 펌프 코드를 뽑았다. 토요일, 남편이 있어서 시킨 대로 한다. 또 굉음이 난다. 남편은 자기 말대로 했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다. 뭘 알고 시킨건가? 일요일인 오늘, 또 캡슐세제와 세 시간 세탁을 돌렸는데 굉음이 또 난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이래라저래라. 결국 틀린 소리였잖아. 짜증 섞인 목소리로 새로 사라고 말했다. 


남편은 짜증을 짜증으로 받아친다. 내가 이걸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데. 넌 전혀 신경도 안 쓰면서 그 따위로 말을 하냐. 늘 군자처럼 무던하던 남편이 짜증을 내니 이것 봐라, 하는 아니꼬움을 즉각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쫄아서 눈을 깔았다. 얼마 후 그는 새 펌프를 주문했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내가 느낀 아니꼬움과 쫄았음의 성격과 순서가 스스로 흥미로웠다. 남편은 늘 나를 도와주고, 나에게 가장 좋을 방법을 제시한다. 나의 온갖 히스테리와 변덕과 속좁음에 딱히 영향을 받지 않거나, 나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 방법으로 자신의 무던함을 고고히 유지한다. 남편의 무궁한 이타성과 너그러움, 나로부터의 철저한 자기 방어력에 감사하며 산다 생각했는데. 아니꼽단 감정이 먼저인걸 보면 가짜 감사인가 보다. 잘해주사람을 내 밑으로 여기고 어디 감히 짜증을? 하고 순간 깔보았으니까.


한편 제대로 모르고도 안다 여기고 나에게 지시하는 것은 그것대로 아니꼬울만하다. 오판이더라도 자기 판단에 믿음이 있다. 오판을 진행시킨다. 자기 판단에 완전한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정도의 믿음있어도 진행시켜 볼 만하겠단 판단을 했을 터이다. 나라면 99% 믿어도 1%의 의심 때문에 남에게는 못 시키거나 사족을 붙이며 미안해했을 것이다. 자기를 의심하기보다 믿어주고, 그 믿음을 남에게까지 수월하게 미는 성질이 아니꼽고 샘까지 나는 것이다.


종국에는 쫄았다. 자신감이 딸려서 같다. 혹은 이타적인 사람의 돌변이 두려웠거나. 나를 더 믿어주고, 남편에게는 친절해지기로 한다. 남편의 오판과 실행은 아니꼬울만했음은 잊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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