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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병찬 Dec 29. 2023

연말, 사회복무요원의 세 가지 생각

1.
즐겁게 공부하려고 시작했던 일본어가 스트레스가 된 것을 발견한 연말이다.

지난 8월 말에 일본 여행을 다녀오며 좋았던 기억, 한국인이 접근하기 용이한 언어라는 사실, 앞으로 사회복무를 하며 시간이 많이 남을 것이라는 희망이 나로 하여금 일본어를 시작하게 했다.

그렇게 2개월 반 동안 공부하고 나니 홀로 꾸준히 학습하는 것에 정체를 느꼈고, 이를 타개하고자 일본어 학원에 등록해 2개의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2개의 수업을 병행하는 것이 꽤 큰 무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저녁밥도 제대로 못 먹고 3시간 반 동안 수업을 들어야 하는 것은, 24살에게 꽤 서러운 일이다. 여담으로, 고등학교 때는 그렇게 해도 서럽지 않았다.

성취의 맛은 달콤하다.

크고 작은 목표를 성취한 경험은, 자신에 대한 자신감의 근거가 되고, 자신감 있게 세상에 도전하는 모습으로 발현되며, 이는 또 다른 성취의 경험을 만드는 좋은 순환 구조를 이룬다.

동시에 성취의 달콤함에는 중독이 있다. 성취에 중독되면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게 된다. 억누르고 참고 견디는 것, 그것이 현재의 나를 드리우는 공기가 된다.

그렇게 세상이 나를 억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얼마 가지 못해 어김없이 우울해지고, 그 우울의 호르몬은 성취의 선순환 구조를 보란 듯이 깨뜨리며 중독에 대한 벌을 내리는 듯하다. 더 이상 나아갈 힘을 잃고 무기력과 우울의 그늘에 갇히게 된다.

다행히도 그 그늘 안에 있어 볼 때야, 여유의 햇살이 얼마나 따사롭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다행히도 앞으로는 그 여유의 햇살과 함께 일광욕이나 좀 즐겨야겠다는 생각과, 또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촉도 나를 찾아오는 듯하다.

앞으로는 수업은 하나만 듣고 남는 시간에 글이나 써야지, 아니면 신문에 실린 에세이 한쪽이라도 정처 없이 읽든지.


2.
오늘은 3개월 반밖에 하지 않았지만 꽤 길게 느껴졌던 식당 일이 완전히 끝나는 날이다.

최근에는 어르신들께 밥을 퍼드리는 일을 했는데, 하루에 800명씩 물밀듯이 들어오는 인파를 2명의 배식원이 감당해야 하니,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같이 하던 다른 사람은 나보다 30분 일찍 그만두신다. 그러면 남은 30분은 혼자서 모든 밥을 떠야 하는 것이다.

밥통에 밥이 떨어지면 미리 준비돼 있던 다른 밥통으로 교체하여 배식을 계속하는데, 끝나기 15분쯤 전이 되면 밥을 지으시는 취사원분께서 밥이 얼마 없으니 조금씩 드리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주기적으로 찾아와 나의 귀에 대고 계속 유언의 압력을 넣는다. 동시에 어르신들은 밥을 더 달라고 하신다.

쉽지 않은 일을 하면서 눈치까지 봐야 한다니!

식당 부서에서의 마지막 날인 오늘까지도, 이 압력을 받으며 눈칫밥도 아닌 눈칫일을 했다. 좋지 않은 기억이 식당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되겠구나 싶었다.

감사하게도 좋은 날씨 덕에 점심시간에 나가 동네 공원을 산책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은, 좋지 않은 기분을 내 몸에서 털어버릴 정도의 힘은 되었다.


3.
무색무취의 공기가 요즘 들어 유색유취처럼 느껴지는 것은 연말이 가진 힘일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각자의 한 해를 돌아보고 싶어 하고, 세상에서는 여러 시상식이 열리며 굳이 굳이 박수칠 일을 만들고, 어떤 곳에서는 한 해의 묵은 것을 정리하는 의미로 대청소를 한다고 하니, 이러한 연말의 흥성거림이 공기를 색취를 바꾸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도 폭신한 자리에 앉아 연말 앞에 서고 싶다는 강력한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 강력함에 비해 미약한 2000원짜리 커피나 한잔 구매했다.

그리고 곧 나는 다른 누군가처럼 체계적으로 한 해를 돌아볼 수 있는 위인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23년이 어땠는지를 생각하면 대충 느껴지는 감정을 배경 삼고, 몇 개의 주요한 기억과 사건을 그 위에 채워 넣으면 충분하지 않은가.

이러한 핑계를 대며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은, 나는 2023년을 돌아보는 것 따위의 귀찮은 일보다, 연말의 단순한 흥성거림의 색취를 훨씬 더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단지 다사다난의 파도 속을 작은 돛단배 위에서 힘을 다해 노를 저으며, 어찌저찌 통과한 것 같다는 느낌 정도는 든다. 다행이다.


지금까지 사회복무요원으로 일하던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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