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아도 밟히지마 ep.02]
함께 방송국 공채 1차전형인 서류심사 결과를 기다리면서 한 친구가 말했다.
“이번에는 해당 지역 출신으로 뽑는다며? 어차피 여자는 안 뽑고 남자만 뽑는다고 하던데?!”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런 고급 정보(?)를 이미 다 알면서 해당 지역 출신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너는
도대체 왜 지원하는 거야?’
사실 그 친구만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은 아니다. 어디 출신의 대학을 뽑는다더라, 미인대회 출신자를 뽑는다더라, 토익이 몇 점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하더라, 심지어 이건 노력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는 합격 가능한 성별까지 이야기가 돈다. 그리고 결론은 이미 합격시켜놓은 내정자가 있는데 방송국의 채용 과정은 보여주기식일 뿐이라고.
시험 정보에 빠삭한 아나운서 지망생들이 하는 말이라면 어느 정도 근거 있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마음이 들었다.
‘방송국에서 남자를 뽑으려고 했다가도 나를 보면 나를 뽑고 싶게 만들어야지!’
‘미인대회 출신은 아니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실력으로 가장 돋보여야지! 뽑고 싶게 만들어야지!’
면접은 사람이 진행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움직인다. 이를 믿고 싶었고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내정자라는 허상 때문에 시작 전부터 체념하고 싶지 않았다. 시험 현장에서 나는 면접관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매번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나에게만, 내 실력에만 집중했다.
'내. 정. 자', 시험 과정에서 항상 등장하는 존재다. 초등학교 학생회장 선거와 같은 작은 사회에서도, 박 터지게 경쟁하는 조직 내 승진 싸움에서도, 일단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경쟁에선 언제나 나오는 말이다. 물론 정말일 수도 있다. 이미 내정자가 있어서 내가 하는 노력이 보상받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정자를 이길 만큼의 나만의 ‘무언가’를 보여줘야겠단 자세도 한번 가져봤으면 좋겠다.
실제로 이번엔 남자를 뽑는다는 이야기가 돌았던 방송국에서 여성 지원자 단 한 명만 뽑은 적도 있었고, 예상과 다르게 해당 지역 출신이 아닌 타 지역 출신 지원자가 뽑힌 적이 더 많았으며, 합격 기준에 대한 소문보다 턱없이 부족한 스펙으로도 당당히 합격한 지원자들도 많았다. 어쩌면 그중에 한 명이 나일지도 모르겠다. 출신학교도, 스펙도, 외모도 평범한 내가 300: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최종 1인으로 합격도 해봤으니 시험 전 무수히 도는 ‘카더라’는 정말 의미 없다는 걸 내가 증명할 수 있다.
환경이 좋아서, 갖춘 조건이 좋아서, 타고난 이미지와 실력이 좋아서 내가 원하는 바를 쉽게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러지 않더라도 ‘그놈의 내정자’에게 지지 말자. 사람의 마음은 움직인다. 당신은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충분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