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던 그를 무너뜨린 한마디
회사에 영업직무를 수행하는 동갑내기(50살 언저리) 부장이 한 명 있습니다.
이 사람의 영업 스타일은 오피스 드라마 ‘미생’의 박과장 같은 허장성세형으로서 소위 고인물의 전형입니다.
즉 제품과 브랜드의 힘으로 영업을 하는 게 아니고 자신을 팔아서 영업하는 스타일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골프와 술입니다.
평소 언행도 술 좋아하고 노는 거 좋아하는 스타일 그대로였습니다.
업무 관련된 대화보다는 사적인 관심사에 대해서 얘기할 때 목소리가 훨씬 컸습니다.
물론 한때는 회사 경영진이 이러한 영업 스타일도 필요하다 하여 채용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정석에서 벗어난 업무 스타일은 호불호가 갈리게 마련이고, 경영진과 영업전략이 바뀜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와 역할도 달라지게 됐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작년에 연속된 업무 실책으로 회사에 금전적 손해뿐만 아니라 소송 전까지 불러오게 됐습니다.
이에 작년 연말에 회사에서는 퇴직을 유도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본인의 완강한 거부 끝에 퇴직 준비를 위한 시간 부여와 새로운 조직 내 활용을 겸해서 팀장직에서 내려오고 새로운 영업 부서 내 업무를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조직의 일말의 기대와 다르게 그 부장은 그다지 긍정적인 결과를 보여주진 못해서 점점 회사에서는 나가줬으면 하는 바람만 커져갔고 서서히 투명인간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근로기준법과 관련 판례에 따르면 극단적으로 표현하여, 개인이 다소간의 부당함과 모욕감을 참는다면 직원을 단기간에 해고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이 부장도 결국 그런 이유로 거의 9개월 가까이 조직 내에서 머물렀던 것이고요.
입사 시 작성했었던 근로계약서를 기준으로 근무를 시작하지만 계약서 작성 후 계속 회사를 다니게 해주는 것은 그 근로계약서라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고 고용인과 피고용인 누구도 보거나 서명한 적 없는 신뢰계약서에 기반하여 근무한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신뢰계약서란 제가 만든 신조어입니다.)
신뢰계약서란 사람마다 느끼는 것과 표현이 다릅니다.
누구는 정(情)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의리라고도 하며, 크게는 운명이라고 까지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위에 말한 것들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신뢰계약서도 기한도 처우도 업무도 쓰여있지 않은 그야말로 매우 추상적이고 유연한 계약서입니다.
신뢰계약서는 매우 단단하다가도 한번 허물어지기 시작하면 다시 복구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연약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로계약서가 근로기준법을 기반하여 대동소이한 내용만을 담고 있고 대부분 회사에서 비슷한데 반해, 신뢰계약서는 각 개인마다 다 그 내용과 구속력이 천차만별입니다. 기한도 없습니다.
가끔 근로계약서를 안 쓰는 회사가 있다는 얘기가 뉴스 등에 오르내리긴 하지만, 근로계약서 없이 근무할 수는 있어도 신뢰계약서 없이는 근무할 수 없습니다.
영업 부장과의 면담에서 그를 움직이게 한 마지막 멘트도 이 멘트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갖은 변명과 고집으로 버티던 영업부장은 사직서에 서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