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 추천 구기 종목
내가 처음으로 탁구를 친 것은 국민학교 때였다. 탁구장이 아니라 교실에서 책상을 이용하였다. 라켓은 검정고무신이고 공은 직접 만든 수제 품이였다. 새알죽 만들듯이 비닐을 불로 태워 손바닥으로 비벼서 둥그렇게 탁구공을 만들었다. 1970년 중반 중학생이 되었을 때 동네에 처음으로 탁구장이 생겼다. 그러나 돈이 없어 입장도 못했다. 그 후 정식으로 탁구를 접한 것은 성인이 되어 중국 주제원으로 근무할 때였다. 1995년경 이였다. 중국은 공산주의에서 개혁개방이 막 시작될 때였다. 놀라운 것은 탁구장이 없는 곳이 없었다. 실내는 물론 야외공원에도 탁구장이 있었다. 테이블은 시멘트로 허술하게 만들어져 있지만. 비가 와도 끄떡없고 그 위에서 춤을 춰도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테이블이었다.
등록된 선수만 3000만 명이고 탁구만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고 했다. 중국의 탁구 열풍은 감히 짐작이 갔다. 귀국하여 중국에서 마구잡이로 배운 탁구 실력으로 회사 동료나 동네친구들과 내기 탁구를 많이 쳤다. 규칙도 폼도 무시하고 눈을 속여 점수만 내는 그런 게임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게임을 할 수 있는 구기 종목을 하고 싶었다. 이 나이에 축구나 야구는 아닌 것 같고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탁구를 하고 싶었다. 개폼이 아니라 정식으로 탁구를 배우고 싶었다. 아파트 바로 앞에는 "김혜선 탁구클럽"이 눈에 띄었다. 매일 그 앞을 지나가면서도 발길이 가지 않았다. 정식으로 맘먹고 등록하기까지 딱 1년이 걸렸다. 망설인 것이 후회가 되었다. 한국체육대학교 졸업하신 김혜선 관장님의 매의 눈으로 나의 개폼을 교정하여 주었다. 미세한 동작까지 지적을 하며 따라 하면서 흉내를 내었다. 오래전에는 라켓은 거의 펜홀더를 사용하였다. 셰이크핸드로 바꾸면서 여간해서 폼은 고쳐지지 않았다.
탁구는 나이 들어 추천할만한 스포츠다. 심한 운동도 아니고 자기 체력에 맞추어 따라가면 되는 운동이다. 나이와 장소를 불문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어도 할 수 있는 실내 스포츠다. 계절에 관계없이 사시사철, 불철주야로 할 수 있다. 남녀노소, 장애인도 즐길 수 있다. 섬세하고 중독이 강한 스포츠다. 순발력과 반사 신경이 요구되는 구기 종목이다. 공이 라켓을 떠나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과학적 원리가 숨어있다. 게임에 있어서 고도의 심리전이 작용한다. 강한 집중력이 필요한 멘탈 종목이다. 게임에서 멘탈이 무너지면 실력과 관계없이 무너지는 스포츠다. 타인과 싸우는 게 아니라 자신과 싸우는 게임이다.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면 기술도 안 먹힌다.
탁구는 체격, 체중, 체질과 아무 관계가 없다. 농구와 배구선수는 키가 크고, 럭비와 축구는 체격과 체질이 강해야 되지만 탁구는 아무 관계가 없다. 중국 탁구 선수 덩야핑 키는 149cm, 가냘픈 체질이지만 세계를 7년 동안 재패를 하고 은퇴를 하였다. 다시 공부를 하여 칭화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켐프리지대학에서 박사를 받았다. 집념과 의지를 갖고 끝까지 나가면 작은 키는 핸디캡이 될 수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탁구의 역사는 유럽의 궁전에서 발생하여 인도와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탁구 이름도 고시마, 플림플람, 핑퐁, 테이블테니스로 불려지고 있다. 탁구공은 코르크, 셀룰루이드에서 2014녀에 와서 지금의 플라스틱 공으로 발전되었다. 라켓은 나무로 치다가 1902년에 러버(고무)로 보안된 것을 국제대회에서 채택하였다.
우리나라 탁구의 역사는 영국의 선교사들이 종교를 전파하려는 수단으로 탁구를 치게 했고, 일제 때 유럽을 통해서 들어왔다는 설도 있다. 역사에 기록된 것은 1924년 경성일일신문사 제1회 탁구 경연대회가 개최되었다고 한다. 1945년 11월 조선탁구협회가 정식 발촉이 되었고 초대회장은 조동식 씨가 되었다. 1952년 싱가포르에서 제1회 아시아 탁구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한민국이 처음으로 국제대회에 참가한 경기였다. 탁구가 올림픽 경기에 채택이 된 것은 대한민국 88 올림픽이었다. 서울대학교 체육관 탁구장이 세계최초 올림픽경기장이 된 셈이었다. 그때부터 대한민국도 세계적인 선수들은 쏟아지고 있었다. 88년 서울 올림픽 때 유남규, 현정화, 양영자, 안재형 그리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유승민선수는 남자단식 금메달 목에 걸었다.
2.7g 밖에 안 되는 제일 적은 탁구공이 지구를 움직이는 사건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세계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적대관계로 나누어 냉전시대가 지속이 되었다. 1971년은 냉전시대를 종결하고 화해의 물줄기를 트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71년 3월 일본 나고야에서 31회 세계탁구 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여러 나라가 참석했지만 특히 중국이 참석하여 개혁개방과 평화의 몰코를 틀었다. 중국은 경기가 끝나고 미국선수와 기자들을 베이징에 초대하였다. 닉슨대통령과 마우저뚱 주석의 역사적인 회담으로 세계는 평화의 깃발을 올렸다. 핑퐁외교로 국제관계와 지구의 평화가 도래하였다.
냉전시대에 대한민국도 작은 탁구공이 만리장성을 무너트리고 사랑으로 성공한 사례가 있었다. 중국은 공산국 가다. 6.25 전쟁 때 북한을 도아준 나라다. 우리는 중국을 북한과 똑같은 공산주의로 적대국가로 취급을 하였다. 1984년 어느 탁구 국제대회에서 안재형과 중국 자오즈민이 처음으로 눈이 마추첬다. 핑퐁은 일대일 주고받는 게임이다. 작은 테이블 위에서 사랑도 주고받았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넘어 사랑은 싹트고 있었다. 겁도 없었다. 당시에는 목숨 걸고 사랑을 해야 했다. 넘어야 할 장벽이 너무 컸다. 외국에 나갔다 오면 안기부에 제출하는 서류가 있었다. 누구와 어떤 대화를 했는지 6하 원칙하에 적어야 했다. 공산국가 중국과 국교도 맺지 않았다. 당연히 비자도 내주지 않았다. 중국사람과 만나는 것만으로 간첩으로 몰려서 서슬 퍼런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던 시절이었다. 안재형과 자오즈민 탁구선수는 어떻게 간담 서늘한 안기부를 피해서 사랑을 했는지 아리송하고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였다. 국제전화는 할 수 없었고 오직 편지로 왕래를 했는데 그것마저 안기부에서 조사를 했다. 애틋한 사랑은 공산주의와 만리장성벽을 넘어 결국 1989년 결혼에 골인했다. 1992년 중국과 정식 국교를 맺기 훨씬 전이였다. 장소는 중국도 한국도 아닌 중립국가인 스웨덴에서 결혼식을 하였다. 결혼을 하고도 한국에 입국 못하고 헤어질까 조마조마하였다. 이념이라는 큰 장애물을 극복하고 결혼에 성공하여 지금은 탁구 스타부부로 잘살고 있다. 아들도 유명한 골프선수다.
탁구가 대한민국을 한때 통일시켰다. 작은 통일이었다. 남북단일팀을 만들었다. 통일된 국가 이름은 "코리아"였다. 국기는 인공기도 태극기도 아닌 한반도기를 사용하였다. 1991년 4월 일본 지바에서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선수는 남한에는 김택수, 현정화, 강희찬, 유남규 선수가, 북한에는 리분희, 유순복이가 활약했다. 단 2개월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서슬 퍼런 남한의 안기부와 북한의 고위부의 감시하에 연습을 하였다. 연습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세계 강국 중국을 이겨냈다. 같은 민족이라 가능했다. 스포츠는 전쟁보다 더 강했다. 남북이 하나로 뭉치면 중국도 일본도 이겨낸다는 교훈을 주었다. 한반도기가 올라갈 때 남북한 온 국민이 아리랑을 불렀다. 응원가로 고향의 봄이 울려 퍼졌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였다. 같은 형제끼리 분단이 되어야 하는 참혹한 현실을 노래로 불렀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동독과 서독이 통일이 되었다. 남북한 탁구 선수들의 활약으로 대한민국도 머지 안아 통일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