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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어단 Mar 23. 2022

파란노을 2집에 대한 단상

1주년 기념 리뷰

https://youtu.be/QWYxPwcTqBQ


현실의 부담과 사회인으로서의 책임들로부터 도망치고 방구석의 숨어든 이들, 우리는 그들을 통칭 '히키코모리'라고 부르곤 한다.

1987년, 일본 정부는 기존의 입시 위주의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주입식 교육에서 탈피하는 대신, 핀란드 등 여러 북유럽 국가에서 채택 중인 여유롭고 크리에이티브한 '유토리 교육' 체제를 각 학교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은, 핀란드 같은 북유럽 국가들은 국토 대비 인구량이 적어 개인의 눈높이에 맞춘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던 반면, 일본의 경우에는 반대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 급진적인 정책은 일본 국민의 전체적인 학습 저하와 사립학교, 공립학교 사이의 심각한 교육 격차를 야기시켰다. 우리는 이 유토리 교육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을 흔히 '유토리 세대'라는 멸칭으로 부르곤 한다.


사회에서 실질적으로 요하는 업무 처리 능력과 개인 간 상호작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들은 곧 '경쟁력 없는 상품' 이 되었고, 더군다나 일본의 휘황찬란했던 거품경제의 전성기가 저뭄과 동시에 급격한 경제 정체가 일어난 시기인 '잃어버린 10년' 과도 맞물려 그들은 사회에서 완전히 도태되고 만다. 결국 그들이 택한 것은 자신의 안전하고 편한 방구석이었다.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부담과 책임들을 모두 떨쳐내고 아무런 근심 없이 지낼 수 있는 유토피아, 자신의 방구석 말이다. 본격적으로 그들의 이야기가 사회문제로써 떠오르고 여러 매스미디어에서 다루기 시작한 것도 이때 즈음이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릴리 슈슈의 모든 것, NHK에 어서 오세요, 잘 자 푼푼. 네 작품의 공통점은 세상에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하고, 아무리 발버둥 쳐 보아도 변하지 않는 나 자신을 지켜보며 서서히 파멸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성인이라면 모든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변하는 것이 도리랄까, 이른바 자연의 이치라는 것이지만 그들은 어린 시절 받은 상처 (가정의 불화라던가 왕따라던가 등등) 때문에 온전한 성인으로 나아가는 것을 자꾸 방해받는다. 일종의 변호지만 그들은 변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다만 지난날의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자꾸 발목을 잡는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주인공 '사토 신지'는 엄마의 죽음과 무뚝뚝한 아빠와의 소통 단절,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주인공 '하스미 유이치'는 학교 왕따와 동급생 자살 사건, 'NHK에 어서 오세요'의 주인공 '사토 타츠히로'는 학우들과의 정상적인 소통 불가, '잘 자 푼푼'의 주인공 '푼푼'은 가정의 불화와 이혼.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적인 트라우마들은 시간이 갈수록 그 형태가 더욱 명확해지고, 자신의 몸을 더욱 옥죄어온다. 이렇게 어딘가 결핍을 가진,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누군가는 경멸하는 반면, 또한 누군가는 동질감을 느낀다.


피란 노을은 나의머리카락뭉치와 전자양 이후 히키코모리 컨셉을 아주 확고하게 음악 속에 녹여낸, 몇 안 되는 한국 인디 아티스트이다. 그의 음악은, 솔직히 말하자면, 괴기하고 조잡하다. 믹싱도 엉망이고,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을뿐더러, 시도 때도 없이 노이즈들이 우리의 고막을 찔러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누가 보더라도 아마추어가 만든듯한 이 작품은 rym 2021년 올해의 앨범 12위, 피치포크 8점 등 신인 아티스트, 그것도 한국인으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그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앞서 유토리 세대에 대한 내 미천한 지식을 장황히 뽐내어보았지만, 히키코모리는 비단 유토리 세대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저 네 개의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맞으나, 히키코모리는 범세기적인, 또한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예전에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나 카프카 변신, 혹은 헤세의 데미안 같은 문학으로, 현대에 들어서는 인터넷에 찐따나 아싸 같은 멸칭으로 자신을 자조하는 사람들로. 히키코모리는 옛날에만 국한되는 것뿐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이야기기도 하다.


한국은 지난 5년간 잃어버린 5년을 보냈다. 급격히 증가하는 부동산 가격, 반면 바닥으로 침체하는 경제 상황, 청년 실업, 0.7에 수렴하는 출산율, 남녀 갈등 등등 정부는 이에 대한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실리를 챙기기에만 급급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공중에 흩날려 어디론가 전달되지도, 전해지지도 않았다. 길을 잃은 그들의 분노는 곧 자신들에게로 향한다.


그들의 패배주의는 자신들에게 발현된다. 그들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본인들을 찐따라고 자처하며 자조하고, 자신과 비슷한 실패의 감각과 아픔을 지닌 이들과 함께 그 상처를 나누고 애무한다. 그들의 자조와 자신을 향한 멸시는 단지 마조히스트적 성향이 깃들어 있는 변태적 행위가 아닌, 서로 동질감을 느끼고자 하는 처절한 발부림이 서려있을 것이다. 그리고 파란노을은 이들에게 있어 치유제이자 공감의 대상, 동화의 매개체이다.


파란노을이 노이즈를 뚫고 전해주는 자신의 서사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상주하고 있는 히키코모리라면 공감과 치유의 대상, 리스크를 환영하고 알을 깨려 노력하는 탐구자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으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자기혐오를 적나라하게 내비친 가사는 메타포로 점 칠 된 문학과는 거리가 멀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의 솔직한 가사는, 모호하게 청자의 주위를 맴돌기보다는 더욱 정확히 그들의 가슴에 적중한다.


흰천장의 가사 중


'혼자서 지내는 겨울밤은 아름다웠고

어느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가 없어서

그대로 시간이 영원히 멈추길 바라네

이대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감탄했던 가사인데, 내가 겨울밤 창문을 바라보며 느꼈던 심상과 굉장히 일치해서였다. 이 부분에서는 늘 들을 때마다 마음 한켠이 아련해지면서도 울컥하게 된다. 이처럼 파란노을은 그때의 순간적인 감정과 기분을 정확히 집어내어 탁월하게 묘사해낼 줄 안다. 머리에 잡생각이 많은 히키코모리라면 다들 한 번쯤 조용히 벽장 안에서 사색해보았을 그런 순간의 부유물들 말이다.


나는 파란노을이 탁월한 수완가라고 생각한다. 그의 음악은 겉으로는 서투르고 아마추어리즘적 성격을 띠고 있으나, 좀 더 깊숙이 살펴보면 마냥 생각 없이 만든 앨범은 아니다. 사람들을 쉽게 몰입시키는 능력이 있으며, 감정이 최고조에 달 했을 때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처럼 시원한 한방을 터뜨릴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다. 노이즈의 잔해 속에 묻힌 여러 빛나는 아이디어를 캐치해낼 수 있는 선구자적인 눈과 귀만 가지고 있다면, 파란노을의 앨범은 더 이상 허술한 인디 앨범이 아닌 꽤 치밀한 설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찐따무직백수모쏠아다병신새끼'라는 문제의 라인이 그렇다. 확실히 자기혐오의 결정체를 담은 가사라 꽤나 거부감이 들지만 동시에 찐따들의 어딘가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기도 한다. 마치 '찐따인데 어쩌라고 시발'이라고 세상에게 외치는 듯한 이 가사는 정말 당돌한 가사이자 또한 찐따들의 마음에 대한 대변이다. 이 가사에서 모든 감정이 고조되고 마침내 폭발해버리면서, 리스너들에게 있어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준다.


또 다른 예로는 피아노의 사용도 그렇다. 자세히 들어보지 않으면 얼핏 놓칠 수 있는 부분이지만, 피아노의 사용은 이 앨범에서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쯤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환상적이며 동화적인 영상과 조 히사이시의 뉴에이지풍 피아노 연주의 조합은 한 편의 추억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으리라 생각한다. 파란노을은 노이즈 뒤에 뉴에이지의 존재를 은근히 숨겨놓음으로써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상기시키는 장치를 마련해놓는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음악은 조잡하다. 솔직히 rym 순위가 높지만 않았더라도 내가 이 음악을 들을 일은 없었다. 지금도 가끔씩 고민한다. 밴드캠프에 숨어있는 뛰어난 아마추어 음악가들 대신, 파란노을이 과연 하이프를 받아야 마땅한 것인가. 이러한 의미 없는 담론을 늘 지속해봐도 어쨌든 대답은 그렇다. 그는 하이프를 받아 마땅하고, 음악적 형식을 깨부수는 데에만 급급하여 정작 청취자에게 초월적인 경험을 선사해준다는 어떤 음악적 본질을 뒷전에 놓쳐버리는, 그런 아티스트들보다 파란노을이 더 낫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렇다. 또한 앞서 말했듯, 그의 음악은 호날두이다. 믹싱도 보컬도 완전 개같이 날로 먹는다. 하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품어왔던 아련한 과거의 정경, 혹은 슈게이징에 대한 향수. 파란노을은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꿈들을 기가 막히게 불러온다. 발 냄새를 맡고 과거의 소중했던 추억들을 떠올리던 짱구 아빠처럼, 우리도 이 구린 음악을 듣고 불완전했고, 아직은 미숙했던, 그리고 상처도 많이 받은 지난날의 청춘을 바라본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불완전한 결핍에 빠져 누군가를 사랑하듯,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 조악한 앨범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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