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함 속의 따뜻함.
몇 년 전 넷플릭스에서는 '길 위의 셰프들'을 방영했다. 각국의 나라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식당을 찾아가 음식을 통해 나라를 들여다 보고 사람들을 만나는 프로그램이다. 한국은 광장시장이 선정되었고 인도네시아에서는 족자카르타의 할머니 시장간식이 선정되었다.
족자카르타에 이사 가기로 결정이 되고 나서, 더욱더 궁금했던 할머니의 시장 간식. 영상에서는 연세가 지긋하신 할머니가 시장에서 장을 보시고 흙바닥 부엌에서 아직도 나무로 불을 피워 음식을 하고 계셨다. 그리고 새벽마다 같은 장소에 나오셔서 일명 '시장간식'을 팔고 계셨다. 인도네시아에 대한 정보가 생각보다 많지 않던 찰나에 넷플릭스의 할머니의 시장간식은 참 흥미로웠고, 족자에 가면 꼭 가보고 싶은 일순위로 마음에 품고 있었다.
하지만 우린 족자카르타로 주거지를 옮기고 2년 동안 그곳에 갈 수 없었다. 할머니의 시장간식이 유명해져서 새벽 5시부터 긴~줄을 서야 했는데, 홈스쿨링을 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혹은 떼어놓고 차도 없는 우리가 새벽 5시에 택시를 불러 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 멀지도 않았지만, 마음먹고 나가는 데까지는 2년이나 걸렸다.
인도네시아는 더운 나라여서 그런지 중간중간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간식거리가 참 많다. 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 것도 중요한데, 지나가다 간식거리 한두 개로 끼니를 때우는 일도 허다하다. 그중에서도 '자잔파사르-시장간식'은 종류도 다양하고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어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즐겨 찾는 것 중에 하나이다. 튀김, 롤케이크, 빵, 찹쌀떡, 밥, 코코넛떡 등등 종류가 정말 많다. 지금도 전통 시장에 가면 다양한 종류의 시장 간식들을 판다.
어떤 종류는 한국의 간식거리들과 제법 비슷하다. 술떡, 찹쌀떡, 약밥, 롤케이크, 풀빵, 크로켓 등등과 비슷한 종류들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은 산탄(코코넛밀크)을 사용하거나 클라파 파룻(코코넛 가루)를 사용하다 보니 호불호가 갈리기도 한다. 코코넛 밀크를 그리 잘 못 먹는 우린 시장간식을 몇 번 실패했었다. 그럼에도 자꾸 먹다 보니 어제보단 오늘 음식이 입맛에 맞게 되고 하나씩 하나씩 그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간식들을 보면 초록색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인도네시아에서는 '판단'이라는 잎을 사용하여 초록색을 낸다. 처음엔 초록색으로 음식을 내는 문화가 정말 낯설었는데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초록색'은 '신선함, 건강함'을 뜻하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초록생 빵, 간식들이 생각보다 많다.
드디어, 남편과 아침시간에 데이트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겨 한숨에 달려왔다. 넷플릭스 할머니에게로..
여전에 그 자리에 계신 할머니를 보면서 얼마나 반갑던지. 할머니는 우리를 모르시지만, 넷플릭스로만 보다가 이렇게 직접 뵈니 오랫동안 알고 지낸 할머니를 만난 듯한 반가움이 있었다.
할머니가 직접 만들어주시는 루피스(시장간식의 한 종류)를 주문하고 옆에 앉아 할머니가 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밀려드는 주문에도 한 접시 한 접시 손수 만드시는 걸 보면서 멀리서 오신 손님들께 직접 대접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실까 감히 생각해 보았다. 전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넷플릭스에 나온 집인데 이전과 같이 길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하나하나 직접 만들어 파신다니.. 그저 속물인 내 생각으론 이해가 안 됐지만, 할머니의 뚝심과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루피스는 바나나잎에 찹쌀을 넣고 쪄서 떡처럼 만든 음식이다. 그 위에 자바설탕과 코코넛 가루 등등을 넣어 먹는다. 그 주변에는 루피스의 친구들인 쯔닐(싱콩가루로 만든 형형색색의 반죽)이나 가톳(싱콩을 삭힌 음식)을 올려 다양한 맛을 더해준다. 한국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조청을 뿌려 먹는 찰떡같은 느낌이다. 자바설탕(야자나무에서 채취한 액)의 맛이 조청과 비슷한데 할머니의 손길을 거쳐 훨씬 고급스러운 맛이 난다.
친환경 포장지인 바나나잎에 올려주시니 그 맛이 배가 된다.
지금은 따님과 함께 그리고 손주와 함께 나와 장사를 하시는데, 60년 동안 한결같이 이곳에서 루피스를 팔고 계신다고 했다. 10대에 일을 시작해 지금까지... 그 사이에 대통령도 왔다 가고, 넷플릭스가 촬영도 하고, 전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할머니를 만나러 왔겠지만 할머니는 변함없이 그 자리 그곳에서 같은 음식을 팔고 계신 것이다. 여전히 같은 모습, 같은 맛, 저렴한 가격으로 청춘을 지나 한평생을 그곳에 머무르고 계신다.
조금은 미련해 보이는 순수함, 난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족자카르타가 좋다. 족자카르타는 그런 곳이다. 발전은 좀 느리지만 손해 보더라도 그 순수한 모습을 간직하려고 노력하는 곳. 사람. 문화. 그 안에 따뜻함이 있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