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틀무렵 May 26. 2024

만권의 책

은퇴 후, 맨 먼저 뒤죽박죽 쌓인 책을 정리했다. 천 권이 좀 못될 듯하다. 책을 열심히 사고 읽어서가 아니다. 손에 들어온 책은 버리지 않아서다. 더러는 빌린 책도 기어이 돌려주지 않은 적도 있었다. 아파트 재활용 수집장소에 이웃이 내다 놓은 책이 내 서가에 꽂힌 것도 있다. 어린 시절 취미가 뭐냐고 물어오면 자주 독서라고 했다. 읽고 싶어도 읽을 책이 없었던 시절이었는데도 그랬다. 독서를 강조했던 선생님의 가르침이 강박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 한쪽을 차지하고 있어 온 것이다.

  

자질구레한 것은 수시로 버리고, 가진 옷가지도 단출하여 자주 아내의 지청구를 듣지만, 책은 버리지 못하고 있다. 서울, 부산, 대구 등을 넘나들며 열 번 이상 이사를 했다. 그때마다 이삿짐 나르는 분의 불평과 웃돈 요구에도 악착스레 안고 다닌 애착 물건이 되어 버렸다. 가장 오래된 것은 중학 시절의 책이다. 초등 일학년 때, 어머니께서 사주신 피노키오 동화책은 쉰 살까지도 고향 집에 있었다. 고향 집은 늘 그대로 있으리라 태무심했는데, 급하게 이사하는 와중에 잃어버린 것은 수시로 떠오르는 아쉬움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책은 읽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사놓은 것 중에 읽은 것이라고 했다. 그런, 책에 대한 욕심쯤이다.

  

하지만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진 책도 모두 제대로 읽었다는 자신도 없다. 회사원 시기에는 자기 계발서나 리더 십 등, 메마른 책을 접할 수밖에 없었다. 흥미가 없었고 관심 분야도 아니었다. 그런 것은 이론으로 될 일이 아니라는 시건방진 생각도 했다. 머리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던 업무 스트레스를 핑계로 독서를 멀리했다. 그런 방탕(?)한 시간이 지금의 후회와 글 쓰는데 허덕임의 근원이 되어 있다. 추사 김정희는 만권의 책을 읽어야 글이 되고 그림이 된다고 했다. 지금에야 그 뜻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이문열 선생은 천 권의 책을 읽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만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대학 동창 중에 뇌과학 분야의 학자가 되어 저술과 강연을 활발하게 하는 친구도 학창 시절부터 만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서재에 만 오천 권의 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많은 책을 다 읽었냐고 물으면, 다 읽은 책을 뭐 하려고 집에 두냐며 지금부터 읽을 것들이라고 했다고 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다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렇듯 한 분야에서 一家를 이루려면 만권의 책을 읽어야 하는 모양이다.

  

사람은 무릇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男兒須讀五車書). 다섯 수레의 책은 얼마나 될까. 옛날에는 수레도 컸겠지만, 책의 부피도 컸으니 수레 하나에 이천 권쯤 될까. 지금의 책으로는 만권이다.  그런 후회와 어릴 적 선생님의 가르침이 남아있어 책 읽기는 생활 일부가 되어 있다. 그러나 지난 삼 년 동안 일 년에 고작 백 권쯤을 읽었으니, 만권의 책은 언감생심이다. 더구나 내게는 만권을 읽기에는 턱도 없는 시간이 남아있을 뿐이다.

  

은퇴 후, 덤으로 얻은 자문이라는 직책도 일 년 전에 끝났다. 동시에 별 쓸데도 없던 두 통, 이 백 장의 명함이 고스란히 남았다. 한 장만 보관하고 나머지는 찢어 휴지통에 던지다가 순간 멈칫했다. 옳거니, 따로 쓸모가 떠 올라서였다. 서너 권을 책을 펼쳐 동시에 이책 저책을 읽는, 이른바 병렬식 독서를 하기에 책갈피가 늘 아쉬웠다. 명함을 책갈피로 쓰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일었다. 휴지통에 처박힐 뻔한 명함은 새로운 임무로 다시 내 곁을 차지했다.

  

과연 명함은 책갈피로도 딱 맞는 소재였다. 한 장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책갈피로 쓴다면 백 권은 읽겠지. 그러나 벌써 일 년이 지났어도 명함은 별로 줄어들지 않아 보인다. 책장을 슬쩍 돌아보니 한구석에서 빨리, 더 많이 읽어, 라며 아우성치는 것 같다. 저것들을 언제 다 없애나. 없앨 수는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배타적 민족성에서 벗어나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