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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옥 Nov 14. 2022

유연히 굽히는 힘에 대하여

이 영화를 보며, 이 인물을 보며 R 생각이 참 많이 났다. 속상하기도, 대견하기도 한 마음에 많이 울었다.

타인의 공격에 두 배로 강하게 반격해 파괴하는 힘도 있고, 유연하게 몸을 굽히며 상대방이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지게 하는 힘도 있다. 난 전자를 지향하지만 화만 많고 싸움엔 큰 소질이 없다. 그렇다고 후자를 택하기엔 자존심이 상한다. 지는 걸 이기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인내하고 아량을 베푸는 R을 볼 때 답답할 때도 많았다. 어른, 정확히 말하면 밥을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사회인이 된 이후에는 내 밥그릇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가 되고 만만한 사람이 되면 한없이 벗겨먹는 세상이니까. 그런데 그 세상에서 R은 모두의 평화를 위한다며 기꺼이 둘리가 되고 양파마냥 남김없이 벗겨지길 택했다. 식당 옆 테이블에서 국제커플인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키득거리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눈을 부라리며 욕을 퍼부어주려 했고, R은 나의 입을 막으며 상대할 필요 없다고 말렸다. 가게를 비울 수 없다는 사장을 대신해 쓰레기를 내놓은 적도 있고(거기 알바도 아니고 손님도 아니고 지나가는 행인이었음), 근 3년째 우리 집 대청소를 대신하는 동안 내가 뻔뻔하게 침대에서 뒹굴며 물을 갖다 달라고 하면 군말 없이 갖다 주는 사람이다. (이건 내가 매우 나빴다. 반성합니다.)


그런 R에게 있었던 최근의 일을 내가 여기에 공개할 자격은 없다. 하지만 폭력주의자인 나의 분노를 들끓게 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고, 난 문제의 genome의 번호를 폰에 띄워두고 통화 버튼을 누르고 싶어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전화가 뭐야, 나는 당장이라도 집을 박차고 나가 그 사람 현관문을 떼어내고 멱살을 잡을 자신도 있었다. 그런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울기 시작한 나를 안고 가만히 다독여주는 R.


그 자리에 있었던 건 넌데, 위로의 주체와 대상이 바뀐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네가 나보다 더 소리 없이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그저 타인을 상처 입히기 위해 공격을 거듭하는 일.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도 상처를 입고, 감정이 가라앉으면 후회할 수도 있고, 혹은 모든 게 성공하더라도 생각만큼 후련하지 않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반면 R은 자신에게 상처를 주려고 시도할 정도로 속이 좁고 악에 받친 그들을 불쌍하게 여긴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쏟아지는 말과 행동을 그대로 흘려보내며 유유히 제 갈 길을 가고, 앞으로도 그럴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내게 말했다. 상처를 주지 못하는 공격은 무의미하다. R은 그를 향한 공격을 그렇게 무력화한다.


그는 득도한 부처라던가 비겁한 패배주의자가 아니다. 혹은 세상을 마냥 아름답게만 바라보는 꽃밭이 머리에 탑재된 바보도 아니다. 오히려 나처럼 하찮고 귀여운 것들에 발끈하거나 감동하고, 때로는 깜짝 놀랄 정도로 냉소적이다. (그런 그가 영국인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그러던 가운데 그가 따뜻하고 관대한 모습을 불쑥 보이면 속으로는 그 조화롭지 못한 유약함을 안쓰럽게 생각했고, 내가 이 호구를 대신해 세상과 싸워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틀렸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는 그의 방식대로 싸우며, 어쩌면 나보다 더 높은 승률을 기록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R은 genome 중 한 명(그렇다, 한 명이 아님)에게 보낸 문자에 “절대 따지거나 화를 내려는 건 아니니까 오해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예쁘게 말하며 웃는 이모지를 덧붙였다. 나였으면 ‘더 보기’를 눌렀어야 할 정도로 장문의 욕설 혹은 내용증명을 보냈을 텐데, 대체 미소를 띄울 여유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는 질문을 듣고 어이없어하며 이건 여유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라고 했다. 그저 적을 만들면 본인이 더 피곤하니까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웃었을 뿐이란다.


그 탁월한 공격에 나도 모르게 서러움이 풀려 울다가 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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