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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옥 Mar 03. 2023

창작 초보가 어렴풋이 깨닫는 것들


작년에 첫 번째 독립출판물을 완성하고 지금은 차기작을 작업하고 있다. 겨우 두 권째 작업이니 내가 이 분야의 대가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한편으로는 초보가 아니라면 경험할 수 없는 다채로운 시행착오 덕분에 이때만 느낄 수 있는 신선한 깨달음도 얻고 있다. 잊어버릴까봐 여기에 기록해둔다.



1. 중요한 건 완성도가 아니라 '완성'이다.

완벽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마무리짓지 않고, 세상에 내놓지 않으면 그건 작품이 아니다. 개인에게 좋은 경험이라던가, 성장의 자양분이 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꼬리표로서 활용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 마음에 쏙 들 정도로 완벽하면서도 완성된 작품은 이상에 가까우니 완성이라도 하자. 창작하다보니 진짜 그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 한참 진행하다가도 갑자기 너무 이상해보이고 또 너무 멀리 온 것 같아서 처박아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잦다.


2. 성에 차지 않는 작품을 내보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처음 계획한 것보다, 나의 머릿속에서 그렸던 것보다 훨씬 부족해보이는 완성작이 나왔어도 그걸 '완성했습니다'하고 공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진짜 어렵다. <지워지는 나를 지키는 일>을 만들다보면 '이걸 내가 세상에 내놓겠다고?' '돈을 받고 이걸 팔겠다고?' 하는 자괴감에 자주 시달렸다.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예약 판매라는 걸 시도한 것 자체가 나에겐 엄청난 용기였고, 그 기분을 지금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작품은 전에 맛보지 못한, 매번 새롭고 짜릿한 두려움을 동반하고... 난 또, 또 용기를 내지 못할까봐 벌써부터 걱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에겐 나의 집필 과정을 꽤 가까이 지켜보고 있는(=그냥 '오늘 작업했습니다'라고 보고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날 작업한 내용 일부를 캡처해서 공유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한 관계인) 동료들이 있다. 작년엔 출판 자체가 처음이다보니 그런 인적 관계라던가 자원이 전혀 없었었지. 올해에는 주변에 의지해서 용기를 내보는 연습을 해봐야겠다.


3. 창작은 계단형이 아닌 나선형으로 이루어진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난 이전에는 하루치 작업을 마치고 나면 자고 일어나서 다음날 그 다음을 바로 이어서 작업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어제 5만큼 했으면 오늘 5를 더해서 10을 만들고, 그걸 몇 번 더 반복해서 차곡차곡 100을 만들면 작품이 짠~하고 탄생할거야! 뭐 이런 믿음. 아유,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제 분명 5를 했는데 오늘 일어나보면 그 5가 갑자기 무쓸모한 것처럼 보인다. 뭐도 마음에 안들고, 어제 보지 못한 구멍들이 막 보이고. 그럼 그걸 다시 0으로 만들어서 어제와 동일한 시작점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며칠 동안 힘겹게 30을 쌓았는데, 오늘 갑자기 그게 0으로 돌아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고, 거기에서 정신적 타격을 입으면 시작점이 -10 정도로 더 밀리기도 한다.


이걸 알게된 뒤로 '매일 에세이 꼭지 1개씩 쓰기' 이런 목표는 세워도, 그걸 n번 반복해서 꼭지를 n개 모으겠다는 단순한 계산은 버렸다. 대신 뒷걸음질 칠 수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서 계획을 좀 더 느슨하게 세우고, 실제로 후퇴하게 되더라도 너무 큰 자괴감을 느끼려 하지 않는다. 그것도 다 창작의 과정이다. 그 과정을 멀리서 보면 앞으로, 뒤로 오가기만 하는 것 같은게 사실은 나선을 그리면서 천천히 상승하는 모양일 것이다. 계단이 아닌 나선이다. 꼭 기억하자.


4. 창작은 노력을 배반한다.

뒤로 갈수록 점점 어그로가 강해지는 것 같은데 나는 진심이다. 양과 질 모두의 측면에서 창작은 넣은 시간에 비례해서 충실한 결과를 내놓지 않는다. 어떤 날에는 갑자기 글이 술술 써지고, 반대로 어떨 때에는 일주일 동안 두 줄도 못 쓰고 그 두 줄마저 다 지워버리고 만다. (3번에서 말한 나선형 성장과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다.) 창의적인 작업은 진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누군가 내게 구몬 학습지를 던져주고 사칙연산 문제를 300개 풀라고 하거나, 예전에 청소 알바를 할 때처럼 닦아야 하는 테이블 개수를 정해주면 나의 성취도를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창작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체력, 컨디션, 충분한 인풋 등의 모든 요인을 관리하려고 해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많다.


5. 좋은 아이디어는 의외로 아무것도 안할 때 찾아온다.

그렇게 글을 붙잡고 아무리 울고 불어도 한 글자도 써지지 않다가, 포기하고 드러누워서 자려고 하는데 갑자기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찾아오기도 한다. 그걸 몇 번 경험하고 나서는 일부러 '좋은 생각이 찾아오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굉장히 모순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말은 어려워 보이느데, 그냥 작업 관련된 생각을 단 하나도 하지 않고 멍-한 상태로 있는 시간을 마련한다는 뜻이다. '내가 이러고 있으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겠지? 어떤 걸 생각해볼까?' 이런 유혹이 들어도 밀어내고 멍한 느낌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 시간을 보내고 다른 걸 하다보면 갑자기 안 보이던게 보이고 돌파구가 찾아지기도 하더라.


6. 그렇다고 항상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된다. 노력이 배반될 걸 알면서도 꾸준히, 일정하게 반복해야 한다.

좋은 생각이 찾아올 때에만 충동적으로, 마구잡이로 쏟아내듯이 작업하고 몇 달 동안 쳐다보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되든 안 되든 적당한 주기로 꾸준히 붙잡고 있는 게 나은 것 같다. 물론 개개인의 스타일과 역량에 따라 전자의 결과가 훨씬 더 좋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모짜르트 같은 천재, 혹은 오랜 시간 동안 쌓인 노하우에 기댈 수 있는 장인들에게나 해당이 있는 말이 아닐까. 지금의 나는 살리에르의 시옷 근처 정도니까, 그런 어떤 예술적 충동이나 요행에 기댈 상황이 아니다. 나를 단련하는 마음으로, 영감이 찾아오지 않아도 글을 어떻게든 써내는 연습을 하면서 그 안에서 전에 모르던 것들을 발견해야 한다.


실제로 이번에 난생 처음으로 청탁 원고라는 걸 작성하면서, 영감을 기다리고 나발이고 마감일에 맞춰서 글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에 부딪혔다. 마감일까지 영감이 찾아오면 다행이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경우에는 두 편의 원고 중 한 편만 수월하게 써지고 두 번째는 그렇지 않았다. 그 원고는 일주일 동안 문단 한 개를 겨우 쓰고 그 뒤로 진척이 없어서 꽤 고생을 했다. 물론 마감일이 코 앞에 닥치니 절박함이 멱살을 잡고 원고를 완성해주었지만, 어쨌든 그때까지 좋으나 싫으나 계속 글을 붙잡고 있었던 덕분에 내가 글이 써지지 않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첫 번째 글은 평소에 나에게 익숙했던 글의 구성, 전개 방식 등에 기댔기 때문에 쉽게 써졌지만, 같은 책에 실릴 두 번째 원고에서 그걸 반복할 수 없다보니 벽에 부딪힌 거였다. 아마 그냥 나를 위한 글이었다면 안 써진다는 이유로 글을 내팽개치고 잊어버렸을텐데, 안 되어도 계속 시도해보니까 이런 교훈도 얻을 수 있었다.


7. 인풋이 없으면 아웃풋도 없다.

좋은 글을 읽지 않으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새로운 자극과 영감을 주는 경험을 하지 않으면 나의 식견은 넓어지지 않는다. 이걸 알게 된 뒤로는, 당장 하고 있는 작업과 큰 관련이 없어도 꾸준히 영화를 보고 전시를 다닌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풍성한 재료를 모아서 뜻밖의 순간에 그걸 꺼내서 쓸 수 있게 되더라.



언제나 그렇듯 배우는 건 많은데, 정작 실천하는 건 배운 걸 따라가기에 한참 멀었다. 뭐, 하다보면 되겠지. 내일도 글을 써야겠다. 안 써져도, 잘 써져도, 계속 써야지. 그래야만 내 자신을 창작자라고 부를 수 있겠지. 이런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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