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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늘보 Feb 17. 2023

가득 채워진 컵에 더 부을 물은 없다.

마음도, 집도, 비움의 미학에 대하여


참 오래도록 글을 쓰지 않았다. 아날로그였다면, 펜을 잠시 내려놨다는 표현이 옳을 듯하다.

다른 분들의 글을 눈팅만 하고 흔적은 남기지 않았다. 괜히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내 감정에 충실하려면.

작년부터 나는 인생의 큰 변화들을 다양하게 겪고 있다. 그 연장선이다.


요즘에는 글을 쓰는 게 쉽지 않다.

술술 쓰지 않는다. 하나하나 뜻을 생각하고 단어를 고르다 보니, 한 줄을 써도, 썼다 지웠다 반복하기를 수차례.

그렇게까지 고민할 필요 없는데도 그렇게 된다. 중복의 뜻을 내포하는 단어는 연달아 쓰고 싶지 않고,

어렵게 읽히는 글도 쓰고 싶지 않다.


나의 생각을 글로 솔직히 정리해오는 것만 치중했다.

내가 그 간 쓴 글을 읽어보니, 술술 읽히는 글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유 없고, 비워지지 않은 글이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읽었던 문장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읽어봐야 비로소 뜻이 이해되는 책은 더 이상 읽지 않고 냅다 던져 버린다.

자신만이 유일한 독자인 일기와 달리, 보이는 글의 가장 중요한 점은 '잘 읽히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간과, 어쩌면 돈을 들여, 읽는 글이 난해하고 어려워, 읽고 또 읽으며 곱씹어야 이해하는 글이라면 나는 그것은 좋은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어려운 내용도, 복잡한 내용도, 어떻게 하면 간결하고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 를 고민하는 것이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첫 번째 마음가짐이라 생각한다.


이런 특성은 나의 독서 취향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데,

나는 소설은 잘 읽지 않는다. 소설 특유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표현법이 내게는 부담스럽다.

내가 좋아하는 글은 개인의 취향이 확실한 에세이, 그리고 시(Poem)다.

어쩌면 내가 영화나 예능은 즐겨 보지 않고, 이웃이나 동물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는 이유이기도 할 테지.





나는 기본적으로 미니멀리스트다.

자취할 때 나의 집에 놀러 왔던 지인들은 (북적이는 게 거북스러워 많이 초대하지도 않았지만) 하나같이 집이 꼭 어디 숙소 같다고들 했다.

그 말인즉슨, 최소한의 가구와, 캐리어 하나에 당장이라도 넣고 나갈 수 있을 법한 짐이 꼭 텅 빈 집 같다는 말이었다.

그 집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침대를 버리고, 텔레비전을 버리고, 서랍장을 버린 일이었다.

전기밥통도 마련하지 않고 냄비밥을 해 먹었다. 빨래는 옥상 빨랫줄에 널었다.

텅 빈 집안에 냉장고, 전자레인지, 세탁기, 장롱 하나만 우두커니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 사는 냄새라고는 전혀 없는, 살풍경한 모습이기는 했다.

지금 사는 집은 그래도 사람 사는 것 같은 느낌은 제법 난다. 아무래도 혼자 사는 집이 아니라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기적으로 물건을 갖다 버린다. 잠시라도 안 썼다 싶으면 다 갖다 버린다.


정제된 환경이 주는 이상적인 균형이 좋다.


우리 집은 큰 집이 아님에도 여유공간이 제법 있다.

내 기준 아직도 물건은 많지만, 그래도 한 가족이 사는 집이니 감수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물건이 많으면 왠지 전세 보증금이 아깝다.

그 짐들을 모두 떠안고 살면서, 움직임의 제한을 받으려고 그 큰돈을 내고 살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집이 나와 내 가족이 살기 위한 집인지, 물건을 떠받들어 모시고 살기 위한 장소인지 구분을 확실히 하고 싶다.

짐이 많아 더 큰 평수의 집이 필요하다면, 그거야 말로 어리석은 짓 아닌가.

결국 짐의 보관을 위해 더 큰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건이라는 것은 본디 사람의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탄생된 것들임에, 사람의 생활을 방해하는 정도의 물건을 놓고 산다면

그건 내가 물건을 가진 것이 아니라 물건이 나를 가진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불편할 뿐 살다 보면 또 다 적응이 된다.

이를테면 샐러드를 담는 샐러드 전용 집게가 없더라도 젓가락으로 담으면 된다. 잘 안 담기지만 여러 번 담으면 된다.

반찬통이 많이 없으면, 반찬통이 있는 만큼만 음식을 조금씩 자주 만들어 먹으면 된다. 이불은 겨울이불과 여름이불을 하나씩 준비하고, 커버를 두어 장 사거나 만들어서 커버만 바꿔 끼면서 쓰면 된다.

불편해서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고, 다이소를 털어오다 보면 집은 오만가지 물건들로 넘쳐나고, 그러면 또 이것들을 보관하기 위한 가구가 필요하다.

그러면 결국 집에 가구가 들어오고, 행동반경은 자연스레 좁아질 수밖에 없다.


우리 집은 물건의 가짓수가 많지 않지만 여전히 나는 더 비우고 싶고, 또 더 비우고 싶다.

집뿐만이 아니다. 나의 생각도 더 비우고 싶다. 마음도 더 비우고 싶다. 시간도, 하루도 모두 다 비우고 싶다.

비워져 있어야 또 내가 좋아하는 색깔과 적당한 크기의 무언가 들을 하나하나 담을 것 아닌가.

그것들이 시간이 지나 언젠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그래야 또 그 시기에 필요한 것들을 담을 수 있다.

가득 채워진 컵에 더 부을 물은 없다.

비워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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