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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토끼 Jul 26. 2024

[01] 비와 퇴근길

어둡고 포근한 기억


[01]



잿빛,  구름,  하늘,  가득…

땅…,  건물…,  마음…,  회색….




 버스 창 밖으로 풍경들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나는 그때그때 보이는 풍경을 속으로 낮게 읊조렸다. 퇴근하는 길. 남은 하루는 이렇게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보내고 싶다. 힘들었다. 스마트폰을 쳐다볼 기력도 없다. 지금 드는 생각은 그저 '찝찝하다, 씻고 싶다, 자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곤 작게 한숨을 토했다. 뻐근한 허리가 결린다. 의자 끄트머리로 엉덩이를 내빼고, 허리를 세워 조금 더 비스듬히 누웠다. 만족스러운 자세를 찾은 나는 다시 영혼 없는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노면…,  웅덩이…,  아스팔트…,  물장구……

우산…,  나무…,  전봇대들……,  샤워…….




 하나같이 필터링이 되지 않는 수수한 생각들이다. 그도 그럴게, 퇴근 중인 시간까지 어른처럼 이러쿵저러쿵 따지며 복잡하게 생각하긴 싫었다. 그냥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 그렇게 명랑하게 생각하는 게 지금으로선 훨씬 좋았다.




 하얀 빗방울 한 올이 차창을 내리긋는다. 빗줄기가 거세지면서 창밖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런 뒤 무릎 위에 놓인 가방을 끌어안고 빗소리에 집중했다. 창살을 두들기는 빗소리, 바닥 물기가 짓눌리는 소리, 우산이 펄럭대는 소리. 모두 부산스럽지만 정겨운 소리들이다. 적당히 소란스러우니 마음 한 편이 고즈넉해진다. 이상하게 집에 가고 싶지만 집에 가기가 싫다. 아니, 정확히는 집에 가고 있지만, 조금 이 적적함 속에 더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다. 찝찝하니 빨리 집 가서 씻고 싶은데, 조금만 더… 이 적적함 속에 더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다. 아무 생각 없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기에…….




 빗소리에 마음까지 젖어서 그럴까. 갑자기 축축한 감정이 몰려왔다. 천천히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그러고 나서 콧바람으로 무게 있는 날숨을 뿜어내버린다. "피곤해……."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였는데, 옆 사람이 고개를 살짝 돌린다. 먹먹한 심호흡이 오히려 서러움을 돋운다. 직장 같은 거 다니고 싶어서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출퇴근 매일같이 하고 싶지도 않다. 어리광인 거 알지만 누가 이런 내 힘듦을 좀 알아줘.




 탁한 빗소리가 서라운드를 채우는 버스 안. 차체가 덜컹거리는 순간마다 내 가슴속에서도 뜨거운 감정이 올라온다. 어른이라면, 사회인이라면 무뎌져야 할 이 고난이 아직은 내게 서투른 걸까?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저 자연스러운 시간의 굴레를 돌다가 어느 순간 어른이 되었을 뿐이다. 반질반질한 옥수수 알갱이들이 뜨거운 통 안에서 한껏 튀겨지다 쏙 하고 구멍 밖을 향해 튀어나오는 것처럼. 고단한 감정이 모여 마음뻘이 금세 우울로 젖어내린다. 20대. 내게는 너무 어려운 시기다. 고개를 가방 품으로 파묻는다.




 감정이 절정에 다다를 때 집은 가까이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건만, 기어이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또 우울해지고 말았다. 빗방울이 영글은 출입문이 열린다. 나도 무거운 발걸음을 그 밖으로 옮겼다. 우산으로도 미처 가려지지 않을 만큼 많은 비가 쏟아지는 밤이다. 에어팟을 양쪽 귀에 대충 꽂고 주머니에 쑤셔둔 스마트폰을 꺼낸다.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곡이 무작위로 흘러나온다. 이 밤 분위기에 어울리는 적적한 노래다. 감동을 주는 목소리를 위안 삼으며 눅눅해진 거리를 홀로 묵묵히 걸어 나간다. 어느새 곪았던 맘 속에 상처도 영글어졌다. 이제 눈앞에 보이는 저 거리만 지나면 집이다. 남은 힘을 쥐어짜 내 발걸음을 마저 옮기며 고된 하루를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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