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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Mar 17. 2024

내 손은 가끔 4개가 된다

소매가 늘어난 옷을 버릴 수 없는 이유

화장실 쓰레기통이 버젓이 있는데 밖에 나와 물을 끼얹고 반신욕을 즐기는 휴지 조각들은 대체 뭘까.

발로 탈출해 나온 걸까.

으으...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을수록 허리를 구부리는 게 싫어서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집을 때는 손이 아닌 발로 곧잘 집어 올린다. 발가락으로 집고 제기차기하듯 다리를 올리면 허리를 구부리지 않아도 물건을 손쉽게 잡을 수 있다.


하지만 물기가 많은 화장실이면 달리 방법이 없다. 허리를 구부리는 수밖에. 그럼 내 얼굴은 험악한 인상파 형님이 된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씻고 또 씻어 깨끗한 요리가 되는데 어찌 입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어쩜 그리 더러워지는 걸까? 소화기관에서 흡수되고 남은 찌꺼기들이 뭉친 덩어리일 뿐인데 외형도 냄새도 어느 것 하나 보듬어 줄 수가 없다. 한데 참 희한하다. 세상 깨끗한 것만 넣고 싶어 하는 입과 결국은 한 줄로 주르르르르륵 이어져 있는 최종 종착지 아니던가. 만일 내장기관을 곧게 펼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좀 길고 두꺼운 빨대모양이 될 뿐인데. 빨대는 구멍이 한 개냐, 두 개냐를 두고 설전을 벌이던 것도 떠오른다.


그 둘은 닮은 구석은 있지만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고 더러운 건 더러운 거니까 어쩔 수 없는 건가 보다. 배설물의 잔여물을 깔끔히 처리하고 장렬히 전사한 휴지쪼가리들은 비데를 사용한 이후라 하더라도 같은 취급을 받는다. 한데 그 더러운 것들을 휴지통에 제대로 골인시키지도 않고 당당히 화장실 문 밖을 나오는 딸내미. 골인이 안 된 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 끝내 못 본 척 나와버리고 나 몰라라 하는 딸이다.


내가 안 치워도 엄마나 아빠가 치워 주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저래서 나중에 20대쯤 되어 독립해서 살 때는 어쩌려고 저 가스나가 저럴까... 싶어 여러 번 불러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다운 법이라고 뒤처리도 깔끔하게 해야 한다 말해도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다.


하기야 나도 어릴 적 딸의 나이 때 어땠나 떠올려 보면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다. 마늘 까기, 대파, 쪽파 까기, 각종 나물 다듬기 등 온갖 집안일을 거들었어도 배설물보다 비교도 안 되게 깨끗한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고 오라는 그 심부름만큼은 죽을 만큼 하기 싫었으니까. 돌이켜보면 중 1 딱 그 나이 때는 예쁘고 귀여운 것만 좋아하고 더러운 것은 치가 떨리게 싫은 나이였던 듯하다.


에효, 작은 한숨을 쉬며 화장실에 비치해 둔 전용 집게를 들어 휴지통 밖에 떨어져 물에 젖어버린 휴지조각을 집어 휴지통 안으로 넣었다. 젖은 휴지니 자꾸 찢어지고 한 번에 잘 집히지도 않는다.


더러운 것은 직접 만지지 않고 눈으로만 보아도 왠지 그것을 만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미 더러운 걸 본 김에 꽉 찬 휴지통을 비우고 새 비닐봉지로 갈아 끼워 주어야겠다. 요리조리 조금씩 공간을 만들고 추슬러 쓰레기봉투를 묶고는 베란다에 둔 쓰레기 종량제 봉투로 가져갔다. 더러운 것을 만지기 전에는 항상 손목을 덮은 긴소매를 팔꿈치까지 슥슥 밀어 올려 '난 이제 집안일을 할 거야.' 하고 소매에게 시그널을 보내지만 소매는 일하지 말고 더 쉬라는 건지 손목의 원래 자기 자리를 찾아 늘 스멀스멀 내려온다. 집안에서 편케 입을 옷이니 저렴한 옷을 구매해서 더 잘 늘어나는 것 같기도 하고. 늘어난 소매는 손목보다 더 밑으로 내려와 여차하면 손가락에 묻은 더러운 것까지 닦을 판이다. 거실에서 여유 부리고 앉아 있는 막둥이를 불렀다.



이미지 출처. 블로그 봉팔이특공대



지후야~~

으응~~?

엄마 소매 좀 올려 줘.

알았어~


냉큼 쫓아와 엄마 소매를 쑥 걷어 밀어 올려주는 막둥이. 출산 후 아이에게 매 순간 수발드는 궁궐 안 나인으로만 살다가 이럴 땐 또 좋은 점도 있네 흐뭇하다. 분명 두 개뿐인 내 손은 갑자기 네 개로 늘어난 것 같아 편리하다. 내일 할 수 있는 일은 내일로 미루는 태생이 게으른 데다 선택적 깔끔을 떠는 나는 만일 혼자였다면 손 씻으러 들락날락하느라 시간도 더 들고 다리도 고단할 텐데 막둥이의 도움으로 거추장스러운 단계를 줄일 수 있으니 시간도 단축되고 일하기가 참 수월해서 좋다.  


묶다 만 쓰레기봉투를 냄새가 빠져나오지 않게 마저 꽁꽁 묶고 여전히 더러운 손으로 화장실 쓰레기통에 봉투를 씌우러 들어가려는데 이젠 바지 밑단이 말썽이다. 아깐 막둥이를 불렀으니 공평하게 이번엔 첫째를 부를 차례다. 마침 딸도 거실에 엎드린 채 주말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중이라 부담이 없다.


딸내미~~~

응~?

엄마 바지 좀 올려 줘.


하고선 바지 꼴 좀 보라고 내 다리를 척 올려 엎드린 딸아이의 눈앞에 대령한다. 바지 밑단의 고무줄이 헐렁해져 발 뒤꿈치까지 흘러내려온 바지로 보일락 말락 한 내 발.

딸내미는 깨끗한 두 손으로 내 바지 밑단을 무르팍 위까지 쓱 올려준다.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고 조금만 올려도 되는데 과하게 올리는 이유는 자기를 좀 그만 부르라는 이야기겠지. ㅎㅎ


집안일을 하려고 소매를 걷어 부쳐 버릇하면 새 옷을 사서 입어도 금세 소매가 늘어난다. 둥게둥게 걷어붙여도 자꾸만 내려오는 소매. 그럴 때 아이들을 한 번씩 불러서 올려달라고 하면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이 나 대신 소매를 올려준다. 작은 손가락이 내 옷을 그러쥐고 피부를 스쳐가며 쓱 올리는 감촉은 소중하다. 그리고 아이의 표정과 행동은 한 폭의 그림처럼, 정교한 사진처럼 내 기억에 저장된다.


늘 앞서 가는 시간은 아이들을 더 훌쩍 키울 테고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다며 초등 때보다 잠까지 줄여가며 학업에 정진할 때가 오면 아마도 내가 아이들을 부르는 횟수는 점차 줄어들 것이다. 아니, 내가 아이들을 부르고 싶어도 참겠지. 또 장성하여 각자의 남친, 여친이라며 소개를 시켜 줄 테고, 또 더 지나 백년해로 할 사람이라며 데리고 와 인사를 하고 각자의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가면 지금처럼 소매를 걷어달라, 바지 밑단을 끌어올려달라 부탁하고 싶어도 더는 할 수가 없을 테지.


마치 미래를 이미 보고 온 사람처럼 지금 이 시간들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진다. 소중함을 놓치지 않고 소중하다고 느낄 수 있음이 참 감사하다. 그리고 이 기억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진다.


아이들이 원하는 모든 걸 다 해 주지는 말라는 조언이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좀 애매하지만 나는 자식에게 무엇이든 다 해주기엔 모자란 게 많고 턱없이 부족한 부모이다. 오히려 벌써부터 자질구레한 부탁을 하며 아이의 도움을 받는다. 그럼 자신이 엄마를 도왔다는 뿌듯함도 느끼고, 엄마, 아빠가 어른이긴 하지만 때로 도움이 필요하기도 한, 한낱 연약한 인간일 뿐임을 깨달으며 좀 더 의젓해지는 것을 느낀다.


아마 나는 내일도 모레도 아이들 앞에 다가가 "엄마 옷소매 좀 올려 줄래?" 하고 말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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