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시아 Mar 26. 2024

달려야 하니

초등생 준비물 언제까지 엄마가 챙겨야 하니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몸이 고생하는 법인데 또 또 사서 고생을 하고 있다.

분명 지난주 금요일에 막둥이 담임선생님께서 내게 친히 문자를 주셨었다.


"어머니~ 지후가 가입한 만들기 동아리 회장이 깜빡하고 지후한테 준비물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고 해서요. 지점토가 필요하다고 전해달래요~"

"아, 네 알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선생님~"


아마 다른 아이들은 모두 휴대폰이 있는데 지후는 아직 휴대폰이 없어서 전달 방법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데 전달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띤 나는 이렇게 살갑게 문자를 보내놓고선 그만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동아리라 함은 일주일의 거의 끝무렵인 금요일 또는 목요일쯤에 학업의 노곤함을 풀 겸 하는 활동이니 준비물을 마련할 시간은 충분히 여유로울 줄 알았다는 게 나의 핑계라면 핑계일까.


일요일 밤 11시 50분, 혹시나 아이 학교 준비물이 있는지 아니면 회신해야 할 공문이 있는지 확인차 하이클래스 어플을 켜보았는데 세상에! 동아리가 월요일 시간표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 큰일 났다. "지점토" 준비를 못했는데!


부랴부랴 쿠팡을 켜 보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 진작에 쿠팡 로켓 와우 회원가입을 하고 다달이 회비를 4900원씩 따박따박 내고 있지만 이미 너무 늦어서 새벽배송은 어림도 없다. 어쩐다.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3년간 등한시했던 우리 마을 인터넷카페에 들어가 보았다. 그리고 얼른 *급구* <지점토 구합니다>라는 글을 1분 만에 작성하여 게시했다.


"저 지점토 가지고 있으니 드릴 수 있어요!" 하고 답글이 달리기를 고대하며 초마다 새로고침을 눌러보지만 이 야심한 시각에 답글이 달릴 리가 있나. 의미 없는 조회수만 늘어간다. 아... 시간표를 미리 확인하지 않은 나를 원망해야지, 누굴 원망하겠나.


12시가 넘고 새벽 1시가 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제 더 이상 나를 구원해 줄 댓글이 달릴 확률은 희박해져만 간다. 5교시니 점심 먹고 준비물을 가지러 나오라 해야 하나... 학교에 전해주러 갈 생각을 하니 귀차니즘이 몰려왔다.





다음 날 아침.

부스스 눈을 떠 막둥이를 불렀다. 사실대로 말했다.

"너 오늘 지점토 필요하대. 근데 지금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아이는 모르고 엄마만 아는 준비물이라니...)"

내심 기대했다. '그래? 준비 안 됐으면 친구들한테 조금씩 나눠달래서 쓰면 돼.'라고 하기를.

근데 아들은 아무 대꾸도 없고,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하긴 구성원이 딸랑 5명뿐인 동아리에서 조금씩 모아봤자 가당치도 않지. 어떻게 만들기를 하겠나 싶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을 이야기했다.

"엄마가 너 점심시간 때 맞춰서 지점토 가지고 학교에 갈까? 아니다. 그냥 2층 학교 도서관 선생님한테 맡겨 놓을 테니까 쉬는 시간에 가지고 가서 쓸래?"

"그래."


대답은 쉽지, 엄마만 귀찮을 뿐.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아이를 학교에 보내 놓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학교 갈 깔끔한 외출복으로 갖춰 입은 다음 나 혼자 다시 또 학교에 들러 '내 아들 준비물이에요. 부탁드려요.' 하며 정신머리 없는 엄마로 보이기가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아침 등굣길에 준비물을 해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1층 화단에 예쁜 꽃들이 흙에서 예쁘게 피어났던데 거기서 대충 흙 두 주먹을 뭉쳐다가 물 좀 뿌려서 덩어리를 만든 후 이건 지점토네 하고 봉지에 넣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꾹 참았다. '그냥 준비물 가져가지 마. 몰라 몰라.' 할까도 했지만, 친구들은 집에서 가지고 온 지점토로 열심히 만들기를 하는데 우리 아들 혼자 준비물이 없어서 물끄러미 친구들 하는 것만 바라볼 모습을 떠올리니 배 째라 모르쇠로 버티는 건 내 마음이 힘들었다. 차라리 잠시 아들과 영혼이 바뀌어 그 자리에 내가 있을 수 있다면 그깟 뭐가 잠시 없는 것 따위는 감수할 수 있을 텐데.


시계를 쳐다보니 7시 40분.

갑자기 번개가 머리를 번쩍 치고 지나가듯 옆 아파트 상가에 문구점이 있던 게 떠올랐다. 나 어릴 때 학교 앞 문방구는 아이들 등교 시간에 맞춰 문을 열었던 생각도 났다. '그래, 문구점은 아침 일찍 열 거야. 못해도 8시에는 열겠지.' 오픈시간이 혹시 나와 있을까 싶어서 네이버를 열어 가게 이름을 쳐봤더니 오! 다행히 8시 오픈이란다. 오케이. 좋았어. 평일에 설마 쉬지는 않겠지 하며 남편에게 문구점에 다녀오겠다고 얘기하고 아이들 등교 준비 좀 도와달라고 하고는 얼른 점퍼만 주워 입고 집을 나섰다.


아침 공기가 산뜻하다. 그러고 보니 8시가 되기도 전에 밖을 나온 것도 오래간만이네. 주변을 둘러보다 시계를 보니 7시 50분이 넘었다. 잘못하면 지각이다. 뛰듯 걸었다. 경보선수가 된 양 엉덩이를 씰룩씰룩하며 빨리 더 빨리 걸었다. 뛴 것도 아닌데 몸이 덥다. 벌써 이렇게 봄이 왔구나. 드디어 문구점 간판이 보이고 건물 안으로 얼른 들어갔다. 저 복도만 지나면 이제 내 숙제는 끝난다. 설마 문구점에 초등생의 필수품인 지점토가 없지는 않겠지 살짝 불안감을 가지고 드디어 문구점 앞 도착.


어... 7시 58분. 이제 겨우 오픈 2분 전인데 문구점은 CLOSED 팻말만 당당히 걸려있다. 8시 오픈이라면 최소 10분 전에는 안에서 부스럭거리며 오픈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니었나? 음... 8시에 짠~ 하고 문을 열려고 그러는 거지? 2분 있다가 여는 거지? 혼자 속으로 주문을 거는데... 째깍째깍 시간은 흐르고 8시 정각이 되었건만 주인아저씨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아... 사장님... 8시 오픈이라면서요. 오픈한다 하셨잖아요...ㅠ 하아... 시간은 왜 이리 빨리 흐르는지. 8시 2분... 3분... 문구점 안도 바깥도 개미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텄다. 망했다... 희망을 가지고 운동화를 질끈 매고 내내 경보로 여기까지 왔는데... 허무함이 사무쳤다.


그때!

"띠리링" 알림이 울렸다.

카페 새 글 알림이다! 어제 카페에 부랴부랴 올렸던 *지점토 급구* 내 글에 댓글이 달렸다. 와우. 지점토를 곱게 찍은 사진에다가 친절하게 "제가 갖고 있는 게 있는데 이런 것도 되나요?"라는 글이 올라왔다.


와! 대박! 나이스 타이밍!


"네네, 돼요, 돼요, 다 돼. 지점토이기만 하면 돼요."


급히 어디시냐 쪽지를 넣고 귀인의 동 호수를 받았다. 다행히 나는 3단지, 귀인은 2단지였다. 현재 위치에서 약 800미터 거리다. 아이들은 보통 8시 20분에 집에서 출발한다. 이제 남은 건 스피이드!


나는 초등 1학년 때 100미터 최고 기록이 22초였다. 뛰기만 하면 무조건 1등이었다. 뒤에서.

박진영의 '너의 뒤에서'라는 노래가 나왔을 때 묘하게 동질감을 느꼈다고나 할까. 늘 나는 누군가의 뒤에서 뛰었다. 어쩌면 다들 그렇게 빠른 걸까. 나중에 알았는데 난 오른팔과 오른 다리가 같이 나가는, 빨리 뛸 수 없는 모양새로 뛰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걸 고치고 고 3 때는 17초를 찍었으니 장족의 발전이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이제 달려야 한다.

귀인의 집에 당도하였으나 그게 끝이 아니다. 돌아가야 하니까. 이제 시작이다. 문고리에 걸어둔다 하셨으니 그걸 잡자마자 9층에 머물러 있는 엘리베이터를 재빨리 누르고 또 바로 집으로 뛰어와야 한다. 숨이 가쁘다. 뛰어본  얼마만인가.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SES의 "달리기"를 커버한 옥상달빛의 "달리기"가 귀언저리에 들려오는 것만 같다.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이 달리기가 끝나면 아이들 하교 전까진 오랫동안 쉴 수 있겠지


점차 숨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불규칙적으로 쉬어지고, 심장은 터져나갈 것 같다.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보니 8시 17분. 마침 비번인 남편이 아이들 등교를 시켜 주기로 했는데 내가 제시간에 돌아오지 않으면 깔끔히 포기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에 가버리고도 남을 매정한 사람이라 얼른 전화를 걸어 거의 다 왔으니 내가 집에 갈 때까지 기다려! 하고 말을 하는데 이건 말을 하는 건지 숨을 거칠게 내쉬는 건지 분간이 안 간다. 어찌어찌 내 말을 알아들은 남편은 알겠다 했으니 얼른 전화를 끊고 또 달린다. 막둥이 준비물인 지점토 하나 챙겨 가자고 중학생인 큰 아이를 지각하게 만들 수 없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평소에 자주 산책했던 길이라 뻔하디 뻔한 거리가 그날따라 누가 심술궂게도 엿가락 늘이듯 주욱 늘려놓은 것만 같다. 하아... 멀리 우리 집이 보인다. 휴우... 간신히 세이..브으...



집으로 들어와 신발 신는 막둥이의 가방 안에 냉큼 지점토를 집어넣고 가방 지퍼를 닫아주고 잘 다녀오라고 헉헉 거리며 난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와 대자로 누웠다. 엄마 노릇하기가 이렇게 힘이 들 줄이야... 아직도 희망을 놓지 않고 심심하면 셋째를 낳아 보는 건 어떠냐고 내 옆구리를 찌르는 남편에게 오늘은 심각한 표정으로 쐐기를 박아야겠다. 그딴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아이 셋은 아무나 키우나. 나처럼 이미 깜빡깜빡하는 엄마는 자격이 없다고.





헐떡거리는 숨을 한숨 돌리고 이제 좀 진정이 되었을 무렵, 이름 모를 지점토 귀인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문고리 봉투에 5천 원 넣어 드렸으니 자녀분 과자 하나 사 주시라고 쪽지를 쓰고 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남편이다. 애들 등교시켰으면 그냥 집으로 들어오지 뭘 또 그 사이에 마누라 목소리를 듣고 싶어 전화를 또 하고 그런대 힘들어 죽겠구만 하며 전화를 받았더니 나만의 착각이었다.


"지후가 실내화 가방 놓고 왔대. 1층으로 갖고 내려와 줘. 지금 집으로 가고 있어."


아이고. 이눔아.


엄마는 언제까지 달려야 하니.






https://youtu.be/4FLL5pAPhJw?si=TAEYAitzmdsEnMHX






매거진의 이전글 내 손은 가끔 4개가 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