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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Apr 01. 2024

아빠, 어릴 때 가정환경은 어땠어?

이혼가정에서 자란 아빠에게 아들이 물었다


아들이 물었다.

아빠! 어릴 때 가정환경은 어땠어?


곤란한 질문이 비수처럼 날아와 남편의 가슴에 꽂혔다.

남편은 일찌감치 한부모 가정의 맏아들로 아버지와 이혼하신 어머니 아래서 홀로 알아서 큰 케이스다. '우리 애들은 지들이 다 알아서 컸어요.' 하고 흔히 자랑하듯 얘기하는 거 말고, 진짜 스스로 알아서 혼자 컸다.


우리 부부는 참 말주변이 없다. 둘 다 말재주가 없는 건 마치 도토리 키재기 같아서 누가 더 잘하는지 따지는 게 의미가 없지만 굳이 따져 우열을 가린다면 글 좀 써보겠다고 엉덩이 무겁게 앉아 모니터 째려보는 시간이 조금 더 있는 내가 그나마 쪼금 더 나은 편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긴개긴이다. 그러니 난감한 질문을 받아 중이 제 머리 못 깎듯 답을 못 찾고 허둥댈 때는 우린 서로의 방패막이 되어 준다. 남편이 곤란할 때는 내가 대신 나서서 대답해 주고, 내가 답하기 어려워 머뭇댈 때는 남편이 알아서 먼저 대답해 주는 상호보완 관계였는데...


어릴 때 가정환경은 어땠느냐는 아들의 주말 숙제(부모님의 전기문 쓰기)의 질문에 남편의 동공은 갈 곳을 잃고 흔들리는 걸 봤으면서도 나는 나서서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서른이 훌쩍 넘어 만난 남편과 나라서 나도 남편의 어린 시절의 가정사는 아는 바가 없기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남편은 어머님이 경기도 어느 지역에서 식당을 운영하실 때 식당에 막걸리가 떨어졌다 하면 경기도 반대편 그 멀리 포천까지 날아가 막걸리를 사다가 드릴 정도로 도와 드렸다고 했다. 음식 맛은 매우 정갈하여 한정식집에 견줄 정도였으나 많은 손님을 상대해야 하는 일반 식당에서 주방일이란 속도전으로 승부했어야 했는데, 매사에 꼼꼼한 성격의 어머님은 식당과는 결이 맞기가 어려웠고 결국 대출받아 시작한 식당이 망해 문을 닫으면 그 빚은 모두 남편 몫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님이 빚을 지면 아들은 빚을 혼자 도맡아 감당하느라 퀵서비스며, 대리기사까지 마다할 수 없었다던 남편의 20대가 떠올랐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송중기가 낮에 하루 종일 일하고도 밤에 대리기사를 뛰다가 무엇 때문인지 제 분에 못 이겨 울분을 토할 때의 모습을 보고선 남편에게도 저런 날이 있었겠지 하고 매우 감정이입이 됐던 기억이 난다.


어머님은 아버님과 사이가 무척 좋지 않으셨다고 했다. 술, 도박, 손찌검까지 골고루 속 썩이는 스타일이라 어머님은 단호히 결단을 내리고 자식을 데리고 집을 나오신 걸로 안다. 이런 가정사를 내가 시시콜콜 더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머님은 당신이 생각하시기에 당신의 기준에서 얘기를 해도 된다 싶은 내용이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부분만은 끝끝내 숨기고 싶은 부분이 있을 텐데 괜히 내가 나서서 아픈 기억을 꺼내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말씀해 주신 것 일부분만 알고 있다.


남편은 더더욱 옛날이야기를 내게 꺼낸 적이 없다. 과묵한 사람이기도 했고, 굳이 다 지난, 좋지도 않은 이야기를 이제 와 다시 들춰 뭐 하겠느냐는 생각이었는지 어린 날의 이야기를 세세하게 해 주지 않아 남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겨야 했는데 오늘 막둥이는 금단의 질문을 하고야 만 것이다.


아빠, 어릴 때 가정환경은 어땠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만일 마누라인 내가 없는 자리라면 대충 얼버무렸을지도 모르겠다만 자신의 가정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마누라 앞에서 거짓말을 완벽히 하는 것도 모양새가 우습고, 그렇다고 어린 시절 매우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고 솔직하게 말하기에도 아들 앞에서 면이 안 설 테고.


게다가 숙제라는 건 집에서 열심히 해서 학교에 가져가면 스물다섯 명도 채 안 되는 반 인원수니 앞 교단까지 나가 발표하는 시간을 갖게 될 텐데 솔직한 말로 이야기해 줄 경우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아버지는 어릴 적 아버지 없이 어머니 밑에서 혼자 자라셨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술과 도박도 모자라 할머니를 자꾸 때리고 폭언하셔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이혼하셨다네요..."

라는 말을 시작으로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에그머니, 그게 뭐야...


남편도 짧은 시간 동안 이러저러한 생각회로를 돌려 봤는지 결정을 내린 듯 아들에게 말했다.


"으응. 화목하게 잘 지냈지."


그리고는 자신의 재능, 취미, 성격 쪽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얼른 화두를 돌리며 이야기해 주었다.

다행이다. 아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잘 넘어간 듯했다.


이혼 가정이 불행하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건 너무 잘 안다. 자식 때문에 꾹 참고 사는 부부도 있을 것이고, 오히려 그게 자식들에게 독이 될 것 같아서 이혼이라는 결정을 내린 부부도 있을 것이다. 또 경력 단절된 여성은 이혼하면 살아갈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이혼을 참고 버티는 가정도 있을 것이다. 각자의 사정과 환경에 따라 생활하는 것을 두고 이게 맞고 저건 틀리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이러나저러나 어린 시절에 많이 속상하고 힘들었을 어린 남편의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이 좀 울컥해졌다.


문득 남편과 내가 꾸린 이 가정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에게 매 순간을 행복한 시간으로 모조리 메워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어린 시절에 아픔이나 고통은 없었다 하고 기억될 수 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요새 남편과 서로 조금 삐걱거린 때가 있었는데 서로 이해하려 애쓰고 어린 시절의 상대방을 떠올리면서 사이좋게 잘 지내봐야겠다는 뜬금없는 다짐도 해 본다.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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