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chetype of Mothering roles
태어나고 내가 가장 먼저 외쳤던 말은 무엇일까?
다들 예상하겠지만 '엄마' 혹은 '맘마' 였다. 세상을 잘 모르는 나이임에도 '엄마'는 주구장창 불러댔다고 한다. 나의 '엄마 찾아 삼만리'는 의무교육을 받을 나이가 되었을 때즈음 멈추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 참관수업은 '어머니'들의 집합소였다. 소풍 도시락은 '어머니'의 전유물이었고 가정통신문은 '어머니' 소통창구였다. 학교 체육시간에는 여학생과 남학생이 따로 놀았다. 여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었고 남학생들은 우르르 몰려 축구를 했다. (물론 이 이야기는 2010년의 이야기다.)
그리고 대학에 와서야 느끼게 되었는데, 어릴 때부터 나는 일종의 성역할을 학습해왔다.
여성의 역할과 남성의 역할. 여성의 성향, 남성의 성향 등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게 '어머니'의 역할 '아버지'의 역할도 가정에 존재했다.
어머니는 부드럽게 아들을 보듬어야 했고, 아버지는 엄하고 강인해야 했다.
이러한 '역할 규정'은 내가 스무살이 되었을 때도 여전히 친구들의 가정에서 발현되고 있었다.
이러한 역할 규정은 '언어'상에서도 '사회구조'상에서도 보일듯 안보일듯 존재해왔고, 지금도 존재한다.
그리고 교육체계와 미디어는 이를 재생산하고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성역할에 부합하는가'라는 식의
자기감시기제를 통해 평가하고 분별한다. 마치 '봄-보임'구조의 판옵티콘 처럼 자신을 통제한다.
그렇게 공고화된 언어적, 사회구조적 역할규정은 때로 모성애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게 된다.
모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부여와 편견을 동반하는 역할규정은 피해야 한다. 예를들어, '여자가 모성애가 있어야 된다', '아이는 모성애를 가진 엄마가 돌보아야 한다'등의 문장이 그것이다.
언어상으로 모성애, mothering은 더 넓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새로운 공감형태로서의 이상적인 원형이 될 수 있음에도 안타깝게도 새롭게 해석될 기회를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모성애는 여성의 역할이 아닌 하나의 사회적 원형이자 내러티브다.
칼 융에 따르면, 원형들에 기반한 신화적 세계는 모든 개개인이 태어나면서부터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겪는 가장 기본 적인 경험들(예: 출생, 사춘기, 어른, 결혼, 이별, 죽음 등등)을 반영하며, 원형(아버지, 어머니, 어린이, 영웅, 창조자, 반항아 등등)의 개념들은 인류 공통적이고 보편적으로 공유하게 하는 힘이 존재한다
다만, 우리가 겪는 가장 기본적인 경험들에 대한 거울이다.
“이름을 지어주고, 사랑한다고 소통하고, 감정을 공감하며 일생을 함께 살아가는 것. ‘mothering’은 내가 브랜드를 키워나가는 마음의 태도이자 나를 정의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우리 모두가 ‘mother’가 될 수 없지만 동사적 관점의 ‘mothering’은 세상과 관계를 맺는 모든 것에 따뜻한 시선을 가지게 한다.” -최주연 윤현상재 부사장
이름 지어주기, 사랑한다고 소통하기, 감정을 공감하기는 여성의 영역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영역이다.
지정성별에 의해 우리는 남,여 (혹은 제 3의성)으로 나뉘게 되기에 나는 mother가 될 수 없지만 mothering의 원형은 일종의 내 삶의 가치로서 행할 수 있다. 세상과 어떻게 관계맺을 것이냐의 문제는 개인의 선택 영역이 되어야 한다.
본질적으로 모성애가 유아의 발달,성장기에 중요한 것은 부정할수없다. 그런데, 왜 그럴까?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공감해주고, 돌봐주고. 이러한 행동들이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아이와 관계맺음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해주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라는 오래된 가설은 어쩌면 아버지가 조금 더 '강인'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닐까? 남자는 디테일에 약하고 여자는 디테일에 강하다라는 식의 사고는 이미 옛날의 것이다.
Mothering은 보편적 원형으로 자리잡아야한다. 이것은 성 구분을 넘어 보편적으로 모두가 갖추어야할 원형이다. 브랜드들도 이러한 mothering을 브랜드 내러티브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하고 원형을 적용하는 것 뿐 아니라 동시대적인 원형의 활용에 대한 고찰이필요. mothering이 무엇인지, 어떻게 구체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서사'가 필요해 보인다. 아직은 클리셰적일 수 있다.
클리셰를 전복하면서 mothering을 성별에 관계없이 보편화하는 것은 아직 남은 숙제이다.
아래는 모성애를 브랜드 원형으로 채택한 랑방의 사례이다.
랑방은 모자 디자인을 하는 틈틈이 딸을 위한 옷을 디자인하여 입혔고, 그녀가 딸을 위해 만든 아름다운 색상과 자수의 아동복은 모자 부티크의 상류층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많은 부유층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위한 옷을 주문하였다. 급기야 모자의 판매량보다 아동복의 판매량이 더 늘어나면서 1908년부터 아동복매장을 오픈한 랑방은 빠르게 성장하였다. 1909년 여성복 라인을 추가하면서 점차 분야를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지극한 모성애의 소유자였던 랑방에게 딸은 영원한 뮤즈, 디자인의 영감 창조의 원동력이었다고 한다. 랑방의 지극한 모성애는 1922년 패션 일러스트레이터 폴 이리브가 디자인한 엄마와 딸이 손을 맞잡고 있는 형상인 랑방의 로고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인용출처: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31654457&memberNo=54115499&searchKeyword=%EB%AA%A8%EC%84%B1%EC%95%A0&searchRank=186
모성애가 광고에 등장하면 우리는 감동을 받지만 금방 클리셰인 것을 알게 된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모성애를 비틀어야 한다. mothering의 개념으로 새롭게 정립하면서 어떻게 이름지어야 하고, 어떻게 관심가지고,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mothering은 반드시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아니어도 적용가능하다. 연인간 관계에서도 mothering을 통해 상호간 이상적인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영화의 클리셰. 한없이 착하고 인자한 어머니와 매정하고 철없는 딸, 또는 애달프게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나이의 갈등과 참회와 넋두리 등. -중앙일보, (7)고정관념을 헤쳐본다-모성애
이러한 클리셰들로 모성애를 규정하는 것을 지양하고, 더 큰 범위의 mothering으로 스토리를 써내려가야 한다. 차별적인 브랜드 내러티브 구축을 위해 기존의 클리셰를 답습하는 것보다 새로운 방식으로 개념을 재정립해나가는 시도도 필요하다. 원형의 힘은 강력하다. 그래서 현대적인 관점의 원형 재해석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great mother에 대한 원형은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아주 강력한 신화로 작용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강력한 신화를 살짝 비틀어서,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상호작용의 원형으로 재해석해보면 어떨까?
마지막으로 아까 인용했던 최 부사장님의 문장으로 마무리해보고자 한다.
"우리 모두 mother가 될 수는 없지만, mothering은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