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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 Name Is Friday Jan 03. 2023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퍽 아름답다

테라, 신지훈 그리고 베를린의 밤

이 글의 초고는 7월 4일에 쓰여졌다. 하지만 신지훈과 베를린을 만나 다시 쓸 수 밖에 없었다.


모든 만남과 이별은 종이 한끗 차이다.


테라의 서버종료 마지막 퀘스트를 보면서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본다.



출처: <테라PC, 팬에 전하는 마지막 인사 ‘라스트 퀘스트’ 공개>, 크래프톤 뉴스온, 2022.06.15

https://youtu.be/ulPfVgjMqnk

테라의 마지막 퀘스트 영상


테라는 마지막을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NPC들이 나와 마지막을 배웅해준다. 영화의 한장면 처럼 말이다.


나는 테라라는 게임의 유저는 아니다. 하지만 피파온라인4를 즐겨하는 사람으로서, 피파 온라인 2때부터 몇몇 서버 종료를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게임에 많은 애정을 쏟은 사람이 느끼는 허탈함과 아쉬움에 대해 조금은 느낄 수 있다. 한껏 캐릭터(또는 축구팀)를 키우고 (또 어떤 사람은 과금을 하고), 레벨 업을 하고.. 게임을 하는 사람은 안다. 아니, 게임을 하는 사람 뿐 아니라 특정한 무언가에 애정을 쏟아본 사람은 안다. 나만의 것을 키우고, 매일 들여다보고, 관심을 쏟는 것이 얼마나 마음 쓰는 일인지를. 무슨 게임인지, 대상이 누구인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일에 대한 애정, 물건에 대한 애정, 그리고 사람에 대한 애정..


처음 만난 뒤로 부터 무언가에 대해 관심을 얼마나 쏟을 것인가는 우리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지만,

그것에 대해 깊게 관여하고 난 뒤, 그것(또는 그/그녀)이 떠나버릴 때에 우리가 스스로 마음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참 속절없는 비극이다.


문득 드는 생각은, "그냥 정을 붙이지 말아버리면 어떨까"

하지만 이내 어리석은 생각임을 깨달았다.


"이별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떤 이별이 가장 아름다울까?"


누군가 이런말을 한게 기억난다. 노래와 향은 그 여행지를 더 오래 기억에 남게 해준다고.

여행은 끝이 나지만 그 노래를 들으면 그 날의 분위기가 떠오르고, 향을 맡으면 그 곳의 온도가 느껴진다고.


그래서 후배 추천으로 신지훈의 <시가 될 이야기>를 틀었다. 베를린 밤 거리에서.

여행은 끝났지만 여전히 베를린의 느낌이 이 노래로 나의 곁을 떠도는 것 처럼.

떠나는 이의 마지막은 아마도 이런것일까?


출처: <신지훈- 시가 될 이야기>, 유투브 채널 온스테이지, 2021.08.26

https://www.youtube.com/watch?v=YPSXmPQl77o

[온스테이지2.0] 신지훈-시가 될 이야기 영상


신지훈의 음성에 자주 따라붙는 수식어 '아련함'을 극대화하는 곡. 담담하고 맑게 노래하는 자신의 소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곡을 직접 만들어냈다. 언젠가 다가올 이별의 순간을 떠올리며 쓴 까닭에 오래된 연가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 노래는 이번 라이브 통해 특별한 편곡으로 동화적인 느낌을 덧입었다. 비브라폰과 플루트의 사운드에 어우러지는 순수한 고백이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다.

                                                                          - 최다은(SBS 라디오 PD / 온스테이지 기획 위원)


베를린에서 내내 이 음악을 들었다. 베를린의 밤과 너무 잘 어울렸다.


"천천히 멀어져 줘요 내게서. 나와 맺은 추억들 모두. 급히 돌아설 것들이었나. 한밤의 꿈처럼 잊혀져가네"

무엇보다 이 가사가 베를린의 찬 바람을 삼킨다.


쿨한 이별? 악수? 꽃 선물?... 무엇이 아름다운 이별인가? 아니, 꼭 이별은 아름다워야 하나?

음..그래, 천천히 멀어지는 것이다. 천천히 멀어져 이내 다시 생각날 수 있게...


나는 이 노래를 베를린 거리에서 듣기 전에는 그저

"인상깊게 보았던 전시회의 포스트카드를 집에 사가지고 가는 것처럼 이별하는 것." 이라 결론지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천천히'라는 [부사]가 빠졌다.

전시회는 끝났지만 그 전시의 온기는 여전히 포스트카드로, 여전히 나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을 넘어

천천히 멀어지는 것... 아! 속도는 왜 생각치 못했을까.


끝나버린 여행이지만 사진첩을 돌려보며 계속 웃음짓는 것. 그날의 말과 행동, 분위기를 상상하는 것

꼭 기념품이 아니더라도.. 현지에서 발권한 1유로짜리 티켓일지라도.. 여행과 나를 매개하는 그 무언가들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여행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베를린 숙소 앞 오프사이드 펍에서 2시간을 떠들었던 베를린 아저씨(형?)들과 헤어지는 것도 너무나 아쉬웠는데 긴 시간을 함께한 인연들과의 이별은 대체 얼마나 슬픈가. 좋아하던 배우가 세상을 떠나는 일, 사랑하는 가족이 떠나는 일, 그리고 좋아하는 동료들과 헤어지는 일... 이십대가 되고 점점 더 이별할 일이 많다. 앞으로 삼십대, 사십대에는 얼마나 더 많은 이별을 겪게 될까.


그래서 더 중요한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방법,

갑작스런 단절 보단 천천히 멀어지기.

베를린에서 만났던 아담과 라펠 형님들에게 펍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 메일을 보냈다. 답장이 안오면 어떤가!

이렇게 기억하려는 노력은 우리의 마지막을 더 늦춰준다. 천천히.


천천히 멀어지면서

좋았던 관계들을 이젠, 나의 기억 뒤편으로 슬며시 가져가는 것

남겨둘 것은 남겨두고 가져갈 것은 가져가는 것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그래서 퍽 아름답다.



[퍽] (부사)

퍽(보통정도를 훨씬 넘게)"를 강조하는 말.퍽 다행스럽게.퍽 불행하게.

앞말이 오는 의미에 따라 뜻이 정반대로 달라진다.


ps. 이별은 상대적이다.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은 지금껏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지만 그 이별소식을 들은 사람은 너무나 갑작스러울테니. 아, 얼마나 많은 마음을 꼬깃꼬깃 접었을까. 그래서 더 매정해졌을까. 참 안타까운 것은 우린 그 매정함을 마지막으로 이별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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