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었다. 펜을 집어 글을 쓰는 것이 익숙해질 때 즈음.
나는 선생님의 권유로 펜글씨 자격증이라는 내 인생의 가장 첫번째 <자격>이라는 것을 따게 되었다
손에 힘도 없는 애가 어찌 그렇게 반듯하게 썼는지 지금은 다시 따라하기도 힘들다.
그때 이후로 스스로를 글씨 좀 쓰는 사람이라 여겼고, 어디가서도 글씨는 그 사람을 나타내는 거울이라는 말을 믿으며 글씨를 써내려가는 것에 신중을 기했다. 적어도 대학에 오기전까지는.
대학에 입학하고 노트북을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편지 쓰기나 서명 하는 것 이외에 거의 펜을 안쥐게 되었다. (그마저도 서명할 일이 없었다) 노트북으로 필기하는 것이 편해졌고 그 속도가 만족스러웠다. 심지어는 타이핑을 하면서 시험준비를 했다. 그 효율성 뿐 아니라 무언가 전문적으로 보이는 그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대학에 와서 썼던 대부분의 글은 늘 나의 문체를 담고 있었지만 대부분 더이상 종이 위가 아니라 화면 속에 존재했다.
노트를 다시 집어들고 글을 쓰려고 해도 몇 장을 넘기지 못할 만큼 노트북에 익숙해졌을 때, 문득 펜과 종이가 그리워졌다. 다시 종이위에 글을 써보았다. 그리곤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PC와 스마트폰 화면 속의 글은 backspace 키 하나만으로 쉽게 지울 수 있지만(심지어는 이 글까지도),
종이 위에 쓴 글은 쉽게 지우기 힘들다. 지우개, 수정테이프 같은 도구들이 있지만 얼룩이 남는다.
쓰는 행위는 종이와 펜으로부터 비롯되었지 않나? 종이와 펜은 나에게 '쓰는 것'의 의미를 알려주었다. 곱씹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편지를 쓸 때면 자주 이런행동을 하곤 한다.마음에 안들면 몇 번이고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종이와 펜을 사랑하는 것은,
카톡으로 보내도 될 말 조차 불편한 아날로그 위에 적어내리는 것은,
쉽게 지울 수 없는 공간 위에
위로를, 사랑을, 격려를, 그리움을 써내려가고 싶은 그 마음들이 모여 이루어낸 알 수 없는 감정의 집합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