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꿈 20210405
나는 은퇴자입니다. 하지만 나는 가끔 직장으로 돌아갑니다. 시기에 구분 없이 어느 때는 최근의 직장으로 때로는 기억에서 사라질 것만 같은 좀 먼 과거의 환경으로 이동합니다. 한동안 직장에 대한 생각은 잊고 있었는데 어젯밤에는 악몽 아닌 악몽을 꾸었습니다. 어느 때라고 단정 지을 수 없지만 과거로 거슬러 가보니 짐작이 갑니다. 내가 한참 교실의 환경에 관심을 두고 게시판을 꾸밀 때입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니 재미를 붙였습니다.
내가 학교에서 대표수업을 맡았군요. 그렇지만 수업도 환경 정리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봄꽃이 피었다 지고 초록 잎들이 앞을 다투어 대지를 물들입니다. 다른 반들은 이미 환경을 잘 꾸민 상태인데 우리 반은 아직도 겨울입니다.
‘이를 어쩌지요, 오후에 대표 수업을 해야만 합니다.’
다른 반들은 운동회다 야외수업이다, 들뜬 마음으로 밖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선 교실에 있는 아이들의 학습활동 게시판을 꾸며야 합니다. 마음이 급해집니다. 준비해 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다른 반을 기웃거립니다. 혹시나 쓰고 남은 자료는 없는지, 우리 반 아이들의 학습 자료를 대신할 것은 없는지. 어쩌다 눈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썩 어울리지 않습니다. 더구나 교실의 주인이 부재중이니 남는 것이라고는 해도 선 듯 옮겨갈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교실의 학습 게시판을 꾸미고 게시물을 어울리게 나열하는 것에 대해 자신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교직 생활 사십 년 중 마지막 십 년이 이에 해당합니다. 갑자기 눈이 뜨였다고 해야 할까요. 재미를 붙인 나는 다달이, 아니 변화를 모색할 때는 한 달에 서너 번 아이들의 게시물을 몽땅 바꿨습니다. 이에 맞게 배경도 바꾸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사를 해서 새집을 꾸미는 심정이라고 말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때마다 옆 반을 비롯한 다른 학년 담임교사나 아이들이 슬그머니 창문을 기웃거리고 때로는 교실을 둘러보기도 했습니다.
“멋져요.”
꿈은 현실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더니만 이런 이유인지 모릅니다. 나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힘들게 합니다.
옆 반 선생님이 연구수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실 환경 꾸미기에 자신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나에게 부탁했습니다. 수업을 참관한 분들이 말했습니다.
“수업도 잘했지만, 환경 정리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
“수업 준비에 고생한다면 옆 반 선생님이 꾸며주셨어요.”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큰일입니다. 나의 시범수업 시작이 한 시간도 남지 않았습니다. 가슴을 조여 옵니다. 이를 어쩌지, 어쩌냐고 하는 순간입니다. 내 옷이, 아이들의 체육복이 떠오릅니다.
‘아, 그거야! 바로 그거.’
마음속으로 내 여벌의 옷을 칠판 뒤편의 게시판 벽에 걸어봅니다. 간격을 두고 아이들의 운동복도 붙여봅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가볍게 앞머리를 치며 소리쳤습니다.
“맞아 얼굴 그리기.”
일순간 나의 조바심이 해결되었습니다.
새내기 교사일 때입니다. 수업에도 자신감이 없었지만, 교실의 환경 정리는 최악이었습니다. 그 시절 학년이 바뀌면 해마다 환경심사가 있었습니다. 교장, 교감을 비롯하여 모든 교사가 각각의 교실을 함께 순회하며 환경 정리에 대해 평을 하고 점수를 매기기도 합니다. 내 점수가 좋을 리 없습니다. 부드러운 곡선 없고 모든 게시물이 사각형입니다. 여백을 살리지 못합니다. 환경을 꾸미는 데는 게시물뿐만 아니라 공간을 잘 살려야 합니다.
‘그림은 여백 놀음, 글자는 간격 놀음.’
내가 공간 구성에 눈을 뜬 것은 교직 생활이 많이 흐른 후입니다. 노력도 중요하지만, 경력 또한 무시할 수 없나 봅니다. 나는 틈틈이 외부의 환경들을 둘러보고 이를 도입해 보기로 했습니다. 한동안 미술관이나 화랑, 전시회를 비롯한 야외의 설치미술을 찾아다닌 일이 있습니다. 사진에 담기도 하고 팸플릿 등을 얻어와 교실 환경에 응용해 보았습니다.
나는 퇴직 후에도 선생으로 남아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가끔이지만 꿈에 내가 머물렀던 공간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나와 아이들과 환경이 다소 어색하게 다가올 때도 있지만 분명 그 자리를 메웁니다. 장소가 바뀌기도 하고 나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 바뀌기도 합니다. 한 가지 같은 점은 꿈을 꾸고 나면 마음이 허전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교직에 대한 미련, 아니 향수가 남아있어서일까요.
나의 꿈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꿈꾸었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여전합니다. 남아있는 미련을 아이들을 지도하는 봉사활동으로 대신해야 할까요. 생각해 볼 일입니다. 아직은 이런 일로 건강을 염려할 일은 아니니 말입니다.
걱정했던 일이 현실이 아님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아직도 가끔 학교의 꿈을 꿉니다. 두 손을 모아봅니다. 아이들이 잘 자라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