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늘 20210904
소래포구의 의자는 믿을 것이 못 됩니다. 포구의 호떡을 먹고 싶다는 아내의 말에 선뜻 응낙했습니다. 길거리 음식입니다. 날짜를 잘못 잡았는지 붐비는 거리가 더 좁아 보입니다. 호떡을 하나씩 컵에 들고 먹을 자리를 찾는데 마땅한 곳이 없습니다. 앉을자리는 많은데 햇살이 따갑습니다. 가을볕치고는 야멸찹니다. 훅 더운 느낌이 드니 아무 의자에나 앉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주저주저하는 사이 한 부부가 그늘이 드리운 의자에서 일어섰습니다. 우리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만큼이나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내가 컵 속에 남은 엄지손가락만 한 호떡을 입에 물때쯤 지팡이를 짚은 노부부가 우리가 했던 것처럼 주위를 둘러봅니다. 앉을자리를 찾는 게 분명합니다. 나는 아내의 손을 살짝 건드리고는 일어섰습니다.
“저쪽 새우 광장에 있는 의자가 좋은데.”
우리는 광장 입구에 다다랐습니다. 멀리서 보이는 그늘막의 의자는 텅 비었습니다. 자리를 빨리 양보하고 오기를 잘했습니다. 한 아이가 비둘기와 갈매기를 상대로 놀이하고 있습니다. 과자 부스러기를 던져주며 이들을 유인했습니다. 먹이를 먹으려고 일시에 많은 새가 달려듭니다. 입에 무는 순간 아이는 이들을 향해 돌진합니다. 놀란 무리가 일시에 흩어집니다. 비둘기는 갈매기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덩치가 커서 그럴까 아니면 집착의 본능이 있어서 그럴까. 부스러기를 가로채는 것은 십중팔구 갈매기입니다.
우리가 잠시 한눈을 팔았지만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랐습니다. 생각대로 두 의자를 빼고는 빈 의자입니다. 다시 두리번거립니다. 따가운 햇살이 빈 의자를 모두 차지했습니다. 엉덩이를 들이밀자 열기가 전해옵니다. 일어서 두리번거렸지만, 그늘진 의자를 차지한 사람들은 떠날 마음이 없어 보입니다. 도란도란 이야기만 이어집니다.
“저기.”
손으로 포대가 있는 동산을 가리켰습니다. 허리쯤으로 옛 철교가 긴 띠를 두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행렬이 움직입니다. 자전거가 보이고 킥보드도 보입니다. 조금 떨어진 새 철교로는 마침 수원으로 향하는 전동차가 장난감처럼 지나갑니다.
동산 위의 큰 나무 밑에 긴 의자 몇 개가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계단을 오르다 보니 대추 알 몇 개가 보입니다. 붉을 것 하나 풋것 몇 개. 순간 위를 쳐다보았습니다. 대추알들이 붉어진 채 한껏 태양과 눈 맞춤합니다. 이럴 수가 있나. 동산 위의 의자도 우리를 반기지 않습니다. 나무 그늘을 피해 햇살에 몸을 맡기고 있습니다.
'아니 가을 햇살이 좋은 줄을 누가 모를까 봐.'
봄볕에는 며느리 내보내고 가을볕에는 딸 내보낸다는 옛말이 있지만 나는 둘 다 아닙니다. 농사일을 거들 일이 있다거나 우리 집에서 고추를 말릴 일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런 날에는 그냥 그늘이 좋습니다. 잠시 주위를 둘러봅니다. 태양은 낭떠러지 쪽으로 그늘을 밀어냈습니다. 오늘따라 나무들은 서 있는 우리에게 그늘을 줄 생각이 없습니다.
저번에 왔을 때는 광장이든 동산이든 의자는 아낌없이 그늘을 빌려왔습니다. 서너 시간은 족히 시간을 보냈습니다. 계절이 맞았는지 우리를 받아주는 시간이 맞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의자 탓이야 할 수 있겠습니까. 나무 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의자는 계절과 관계없이 시간에 구애 없이 그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다시 발길을 옮깁니다. 시계를 본 우리는 음료수 가게를 찾았습니다. 오늘은 돈을 내고 그늘을 샀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잠시 책을 보았습니다. 중년의 딸과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처음으로 어머니를 따라 동네 안에 있는 자그마한 절에 갔습니다. 어머니가 몇십 년 동안 다닌 곳입니다. 겉에서 보는 모습과는 달리 안의 풍경은 복잡하고 화려합니다. 입시 철이 되어서인지는 몰라도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로 붐빕니다. 공간에는 빽빽하게 사람들의 이름이 붙어 있고 소원의 문구도 있습니다. 시주한 물건이나 돈들이 보입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도 귀에 들어옵니다. 이해되지 않는 말들도 있습니다.
딸은 어머니의 기도 모습을 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머니에 대한 흔적은 없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물었습니다.
“어머니의 흔적은 없네요. 모두 재물이나 돈과 연관된 것 같아요. 시주를 많이 한 사람의 이름은 부처님 가까이 그리고 높이 있어요.”
어머니는 말씀이 없으십니다. 절에 대해 푸념하자 어머니가 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그동안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오로지 부처님의 마음만 보았는데 너는 다르구나.”
나는 오늘 무엇을 보았을까요.
어머니의 그늘은 너무 크기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