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고온이라는 얘기가 종종 들리는 봄인데 어째 그 사이사이 비 오고 흐리고 서늘한 날들이 주로 기억에 남습니다. 아마도 내 마음에 볕이 들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난생처음 해보는 대학교 강의는, 준비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연달아 여섯 시간 동안 큰 소리로 말하는 게 힘들고 고속버스로 두 시간 반 거리의 도시를 오가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고, 그럴 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해 보니 더 그렇습니다. 몰랐던 것도 있죠. 오랜 실무경험을 통해 체득된 지식과 기술들이 나에게는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오히려 처음 배우는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 생각해 보니 회사에 다닐 때에도 어느 때부터인가 저 연차 직원에게 내가 직접 일을 가르치거나 시키는 게 어려웠습니다. 뭘 알고 뭘 모르는지조차도 알 수 없으니까요.
3월 초에 강의를 시작한 이후로 나의 생활은 무척 단순해졌습니다. 강의 준비를 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누워 있거나. 활동범위도 좁아졌죠. 동네를 거의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뭐, 마음만 부담스럽지 강의에 매달려 사는 건 아닙니다. 학교 다닐 때 많이 해봤잖아요. 공부해야 하는데, 하면서 마음은 무겁고 책은 손에 안 잡히는 거. 딱 그거죠.
전공 공부와 실무 합쳐서 20년이 넘는 경력을 바탕으로 하는 건데도, 처음 하는 일은 버겁군요. 아주 오랜만에 내게 주어진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좌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자꾸만 가라앉나 봅니다. 카페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 있으면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싶어서 초조하고, 기분전환하려고 산책을 나섰다가도 ‘이따가 언제까지 뭘 해야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금방 되돌아오곤 했네요. 회사에서 일하던 때와 비교하면 훨씬 편하고 스트레스도 덜 받는데 말입니다. 이 나이를 먹어서도 낯설고 미숙한 일을 하게 될 수 있다는 게 새삼 놀랍습니다.
이번 주에는 중간고사가 있는데 시험문제는 미리 다 만들었고, 조교선생님이 대신 시험감독을 해주는 덕분에 집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모처럼 강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서 주말을 보냈죠. 집에서 누워 보내는 시간이 아쉬워서 일요일이니까, 봄날의 일요일이니까 카페에 넋 놓고 앉아서 커피 마시며 상춘을 해야겠다고 굳이 마음을 먹었습니다. 옷을 다 챙겨 입었는데 어딜 가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좋아하는 카페들, 매일 걸어도 좋을 거리와 동네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는데 다들 시큰둥합니다. 몸은 무겁고 마음은 가라앉고.
그 와중에 커피 생각이 간절해져서 일단 커피를 만들었습니다. 전동 그라인더로 원두를 분쇄하고 전기주전자에 물을 끓이면서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가지고 나가 산책하면서 마실까 했죠. 분쇄된 원두를 드리퍼에 넣고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으면서 생각하니 텀블러를 세척하는 게 너무 귀찮습니다. 안 쓰는 게 좋겠네요. 뜨거운 물이 고운 원두 가루 사이를 통과하며 커피가 되어 잔에 떨어지는 걸 보면서 나가는 것 자체가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득 마당을 내다보니 조금 흐리고 살짝 바람이 부는 날씨가 나쁘지 않고 공사 소음도 가까이에 있는 카페의 음악 소리도 실외기 소리도 없이 조용합니다.
커피 잔을 들고 뜨개질해서 만든 컵받침도 챙겨서 마당 구석에 앉았습니다. 해준 것도 없는데 알아서 잘 자란 식물들이 손바닥만 한 꽃밭을 메우고 꽃도 폈네요. 과외 한 번 안 시켰어도 공부 잘하는 자식처럼 기특합니다. 흔한 꽃들이고 볕이 잘 들지 않아서 흐드러지게 피지도 못했지만 예쁘기 그지없는 건 우리 집 꽃밭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담쟁이 소리도 좋습니다. 왜 진작 마당에 앉아서 커피 마실 생각을 못 했을까요.
우리 집 작은 꽃밭으로 바람에 홀씨가 날려 와 민들레꽃이 피어주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기를 다섯 번째 봄. 드디어 민들레가 피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2월 말에, 모처럼 꽃밭을 정리한다고 장미 가시에 긁히면서 구석구석 손을 뻗어 뜯어낸 것들이 다 민들레였을 줄이야. 미처 뿌리 뽑지 못한 몇 중에서 딱 하나가 꽃을 피웠었죠. 며칠 만에 꽃이 지더니 츄파츕스 같기도 하고 불꽃같기도 한 홀씨가 되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예쁘네요. 바람에 홀씨가 하나 둘 날아가는 걸 보면서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기만 하는 내 마음도 홀씨처럼 가볍게 날려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가라앉는 마음을 자꾸 되새기면서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바닥을 딛고 다시 떠오르는 타입이라서 어떻게 해야 가벼워지는지 모르겠지만, 바람에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점점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난생처음 보는 것 마냥 민들레 홀씨를 지켜보다가 벌써 시들기 시작한 영산홍과 라일락이 안타까워서, 봉오리가 동그랗게 부푼 미니장미가 기대되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제 좀 더 자주, 관찰하듯이 꽃이 피고 지는 걸 지켜보아야겠습니다. 아쉽지 않도록.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늦은 감이 있지만 가지 정리를 하려고 다시 꽃밭 앞에 앉았습니다. 살펴보니 영산홍 이파리에 미처 멀리 가지 못한 민들레 홀씨 하나가 걸려 있네요. 떼어서 담장 밖으로 훅~ 불어줄까 하다가 그대로 두었습니다. 내년에 또 민들레가 피면 그 친구구나, 생각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