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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생끝에골병난다 Jul 02. 2023

사는 게 심심하고 반복적인가요?

동어반복적 삶의 깊은 심심함 / 사람은 왜 후회할까 / 잔향을 남기는 것


창밖이 짙고 화려한 색감으로 물들었다. 노곤한 여름이 끝나고, 실핏줄 터진 듯 붉은 가로수를 바람이 훑고 가며 선선한 소리를 낸다. 가을이 오면 기분이 들뜬다. 가을은 또 가성비가 좋은 계절이다. 창을 열고 방안을 지나가는 바람을 만끽하기만 해도 행복 호르몬이 마구 분비된다. 옆 사람이 숨만 쉬어도 불쾌한 여름에는 노래 한 곡 건져보려고 몇 시간 동안 유튜브를 떠돌곤 다. 별 감흥 없이 듣던 플레이리스트로 노래와 오래된 영화로도 깊은 감흥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계절이 시작됐다. 방금 나를 지나쳐간 평범한 노래 두 곡과 오래된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동어반복적인 삶의 '깊은 심심함' <사는 재미. 윤종신>

바뀐 생활도 적응이 되면 또 재미가 없다. 동어반복적인 삶을 피해보려고 어떤 사람은 게임에 빠지고 어떤 사람은 영화를 보고 산다.

다들 어딘가에는 권태로운 일상보다 위대한 것이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래서 모두가 신을 믿거나 혁명을 믿거나 메시를 믿고 살아간다. 믿음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BTS를 믿거나 정치인을 믿거나. 그러지 않으면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아서, 누구는 암벽을 타고 누구는 섹스를 쫒고 누구는 죽음으로 도피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살아있단 걸 느끼려고 누군가는 죽어보기도 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노동력 1'로 만든다. 우리는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부품이 된다. 하지만 존재의 고유함은 새싹처럼 돋아난다. 그 새싹은 사랑하는 마음에게만 보인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말한 '추앙'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사랑하는 일은 자본주의에 맞서 존재의 고유함을 찾아내는 일이다.

아직은 안 그런데, 삶이 빤해지는 순간 앞날이 캄캄하도록 답답할 것 같다.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겠구나, 싶은 생각이 한 번은 찾아들 것이다.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월간 윤종신의 <사는 재미>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의 가사가 내 마음을 움직인 것도 그런 순간의 진심을 담아낸 탓이다.



"난 딱히 재밌는 게 없네
매일 그 일이 그 일이고

하루가 다르게 막 바뀌는
세상 속에 그 뻔한 어른 되기
(..)

아프지 않기만을 바라는
큰일이 안 생기길 바라는
드럽게 재미없는 날들

한잔의 취기도 이제는
언젠가 했던 말 되풀이야

멍하니 알고리즘이
내게 권해주면 난 또 클릭하다 자"



우리는 다들 이런 순간을 알고 있다. 그리고 두려워한다. 사후 세계의 존재로 우리를 다독여주던 종교는 이제 절대성의 위치를 잃었다. 종교인들조차 끊임없이 질문을 받는다. 신이 정말 있냐고. 죽으면 다 끝이 아니냐고. 질문을 받는 순간 대상은 권력을 잃는다. 더는 신도 죽음을 위로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전보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강박적으로 헬스를 하거나 요가를 배우고, 골프를 치고 피아노를 배워야만 할 것 같은 순간이 온다.

어디선가 '청춘은 시기가 아니라 태도'라는 글귀를 읽었다.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 '사는 재미'의 화자가 택하는 방법은 청춘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태도로서의 청춘.




넌 그냥 그렇게 흐를 거니
난 왠지 억울하고 분하다
내 남은 날이 예측되는 게
좀 불안한 게 그리 무섭나
난 지루한 게 더 무서운데
봤잖아 그때 그 선배들

뭐라도 설레는 걸 하자
수군대는 걔들은 신경 꺼
이런 얘길 나눌 수 있는 너와 나면
더 이상 누가 필요해

이젠 우린 뭔가 알잖아
우릴 떨리게 하는 것들
아직도 가슴이 벅차오를 수 있어
꽤 남은 우리 날들







사람은 언제 후회를 할까?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가을방학>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가을방학>. 멜론 화면 캡쳐


사람은 쉽게 후회하지 않는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후회는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중한 무언가를 상실했고, 그 원인에 명확한 내 과실이 존재할 때만  비로소 후회를 시작한다.

'만약'이라는 두 글자를 곱씹는 사람은 무언가를 후회하는 사람일 것이다. 상실과 과실은 후회를 남기고, 후회는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이 돌아봄에는 음악이나 영화, 책 같은 것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내 경험만으로는 이 혼란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는 '예전엔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에도 빠지게 된다.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성장하지 않고, 그래서 후회는 성장의 동기가 된다. '나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었나' 같은 생각을 할 때 우리는 조금 좋은 사람이 된다.

이런 이유로 '너'는 단지 날 아프게 하는 사람이 아니며, 오히려 '수 없이 많은 나날들 속'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일종의 프레임이 되어준다. 난해하던 가사가 어느덧 하나의 프레임을 거쳐 이해된다. 책을 읽을 때, 영화를 볼 때, 계절이 바뀔 때, '너'는 사유의 토대가 되고, 우리는 조금 깊은 사람이 된다.

이정도면 상실을 소화하는 이성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라 할 만하다. 그렇지만 이성은 힘이 약하고,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도 있는 것이다. "너 같은 사람은 너 밖에 없었어 / 마음 둘 곳이라곤 없는 이 세상 속에." 이런 가사를 쓰는 사람은 이미 이성이 마음에게 패배한 사람이다. 그 강한 마음도 '만약'이라는 두 글자를 곱씹다가 무너졌다지만 말이다.




만약이라는 두 글자가
오늘 내 맘을 무너뜨렸어
어쩜 우린
웃으며 다시 만날 수 있어
그렇지 않니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우습지만
예전엔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도 많이 하게 돼

넌 날 아프게 하는 사람이 아냐
수 없이 많은 나날들 속을
반짝이고 있어 항상 고마웠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얘기겠지만

그렇지만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너 같은 사람은 너 밖에 없었어
마음 둘 곳이라곤 없는 이 세상 속에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가을방학)




삶에 가벼운 잔향을 남기는 것들 <중경삼림>


사람들은 먼 도시를 꿈꾸고 먼 옛날을 동경한다. 20대 사이에서 한창 시티팝이 유행이었다. 왕가위 영화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대한 수요도 꾸준하다. 닫힌 면접장의 문을 나서며 흐느끼는 우리의 일상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들인데도 말이다.


중경삼림



동아시아의 호황은 무라카미하루키, 왕가위, 시티팝 같은 것을 남겼고, 우리는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시대를 그리워한다. 하루키의 책과 왕가위의 영화, 생명력이 남아있던 마르크스 사상을 동시에 향유한 세대의 축복은 어떤 것일까. 신자유주의가 지나간 폐허에 태어난 우리는 막연히 미워하고, 동경할 뿐이다.

이런 감정에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인파리>는 현실적인 답을 쥐여준다. 과거에 대한 향수는 고통스러운 현재에 대한 부정일 뿐이다. 모든 시대는 첨단의 벨 에포크기에 우리는 현재에 만족해야 한다. 카르페디엠은 조금 흔한 답이지만 틀림없이 진리이기도 하다. 분명 가장 가난한 사람의 삶의 질은 지금이 더 괜찮을 것이다. 평범한 청년의 삶도 지금이 더 풍요롭다. 다만 영원한 자기착취와 경쟁 속에 사는 우리들은 들어갈 수 없는 스크린 너머의 여유와 낙관이 부러울 뿐이다. 사실 '미드나잇파리' 또한 자신이 제시한 해답을 실천하지 못하는 영화다. 주인공은 레이첼 맥 아담스가 연기하는 '현실'을 미국으로 떠나보내고 파리의 낭만을 선택한다. 그만큼 낭만에는 자력이 있고, 우리는 현실이 서러울수록 그것에 끌린다.


<2046>


중경삼림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이 기억난다. 그날부터 숙제를 처리하듯 왕가위의 여러 작품을 봤지만 모두 중경삼림 만큼의 여운을 남기지는 못했다. '2046'에서는 양조위와 왕페이의 무게 잡는 머리스타일 탓에 자꾸 박정희랑 박근혜의 멜로물을 보는 것 같았다.

영화에서 양조위는 연인이 남긴 이별 편지를 읽지 못하고 압정에 꽂아둔다. 다음날 그의 결근 이유는 압정에 찔렸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대가의 비유다. 영화 곳곳에 장난스러운 발상 같지만 압정처럼 자국을 남기는 표현들이 꽂혀있다.


러닝타임 내내 흐르는 음악도 작품의 분위기를 가볍게 이끈다. '화양연화'의 대표곡이 진득한 재즈 'quizas, quizas, quizas' 였다면, 중경삼림에선 'California dreamin'으로 대표되는 경쾌한 음악이 부담스럽지 않게 흐른다. 별 것 없는 줄거리를 분위기로 압도하는 것이 왕가위의 영화다. 사람들은 분위기를 잡을 때 음악을 튼다. 그러니까 왕가위 영화의 7할은 음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홍콩의 화려함 뒤에 영국의 식민 착취와 저임금 노동이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사실 왕가위 영화가 좁고 어두운 골목 구석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초라한 행색을 한 홍콩 서민들을 은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화양연화>나 <타락천사>, <중경삼림>의 배경은 습하고 구석진 일상의 공간이다. 모순으로 가득찬 세계, 슬픔으로 이어지는 삶 속에서 스쳐지나가는 낭만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 그의 영화다. 심보선 시인이 <슬픔이 없는 십오초>를 포착한 것처럼. 창밖의 청년은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고,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새"지만, 현재는 "꽃이 피고 지는 순간"이지만, 그래서 슬프지만.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그런 순간을 만들어낸 사랑과 음악의 힘을 믿어보자는 것이 왕가위 영화의 메세지다. 비록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기보단 독한 술 같은 마취제일 뿐이지만.



술로 치면 '중경삼림'은 소주나 양주보단 맥주와 화이트 와인 비슷한 영화다. 무게 잡지 않으면서도 잔향을 남길 수 있다. 가벼운 척 하지만 도수는 더 강하다. 가벼운 색의 유니폼을 입은 왕페이, 가벼운 셔츠 차림의 양조위는 압정처럼 기억에 남았다. 둘의 머리스타일도 더 가벼웠고, 그래서 더 좋았다. 호황이 남긴 것들. 우리가 이런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멀리 있기 때문이다. 낙엽이 질 때, 캘리포니아를 그리는 것이다.



<California dreamin>

All the leaves are brown
낙엽이 지고
And the sky is gray
하늘은 잿빛으로 변했지
I've been for a walk
난 어느 겨울날에
On a winter's day
산책을 했었어
I'd be safe and warm
만약 내가 LA에 있었다면
If I was in LA
편하고 따뜻했을텐데
California dreaming
난 캘리포니아 꿈을 꿔
On such a winter's day
이런 겨울 날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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