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물고기 이야기를 들려주지. 그는 늙은 물고기에게 헤엄쳐가서 말했어. "바다를 찾고 있어요." "바다?" 늙은 물고기가 말했지. "네가 있는 곳이 바다란다." 어린 물고기가 말했네 "여긴 그냥 물이잖아요! 저는 바다를 원한다고요
미국 애니메이션이 수렴하는 주제가 있다면 '나 답게 살기' 아닐까. 주인공이 사회의 편견에 맞서 꿋꿋이 '나 다운' 일을 해나가고, 끝내 성취로 증명해낸 이야기를 지겹도록 보고 자란 우리다.
그렇게 어른이 된 우리들의 시대가 불행하다면, 그 주제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뜻이다. 상단에 소개한 영화 <소울>의 명대사는 기존의 미국 만화 영화와 미묘하게 다른 주제 의식을 지닌다. 많은 어른들이 '소울'을 인생 영화로 꼽는 이유 역시 미국형 성공 서사의 괴리를 포착해낸 탓이다.
사회적 동물의 행복
쓸모 있는 사람만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삶은 도달해야 할 어떤 이상향이 있는 여정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를 지향한 그의 스승 플라톤과 달랐다. 플라톤이 '도달 불가능한 이상세계'를 꿈꿨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땅 위의 현실세계'에 집중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향이 그렇듯, 우리는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한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행복을 위해 현실에서 이탈한다면 역설적으로 단절감과 고립감 속에서 뿌리깊은 불행에 빠진다.
그렇다면 행복을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존재에 목적이 있다고 했다. 그에게 모든 인간은 어떤 목적을 담고 있는 잠재 상태다. 우리는 이미 목적을 가지고 빚어진 존재다.모든 인간이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우리 존재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의 목적은 '지속적 행복'이다. 순간의 환희를 제공하고 흩어지는 쾌락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유지하고 싶다는 감정으로서의 행복.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아레테', 즉 '사람이 가진 탁월한 역량, 특징을 잘 사용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단순히 자신의 능력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찾아서 탁월함으로 꾸준히 연마하는 상태가 행복인 것이다.
행복은 '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본연의 자기 자신이 되려는 노력의 과정'에 있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행복 열쇠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동물의 행복이란, 현실에 발을 딛고 자신이 잘하는 일을 찾아서 연마하는 것. 이로써 공동체에 기여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과정인 것이다.
당신은 관찰력이 뛰어날 수도, 경청을 잘하거나 친구에게 식사 대접을 잘할 수도 있다. 남들보다 책을 잘 읽을 수도, 계획을 잘 세울 수도 있다. 무엇이든우리는 타인보다 탁월해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그 일을 찾아내는 과정이 '나'를 발견하는 단계이다. 이를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가치를 인정받는 여정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인 것이다.
안 되면 되는 거 하자
'열심히'의 신화를 믿지 않는다. '주어진대로 열심히 하다보면 된다.' 한국에서는 아직 이런 논리가 먹힌다.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이 있었고, 애쓰지 않아도 남들보다 잘 하는 일이 있었다.
안 되는 일이라도 막대한 자원을 투입하고, 비효율적일 정도로 노력을 들인다면 중간은 갈 것이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노력을 하고 고작 중간이나 가는 것은비효율적이다. 각자에겐 같은 노력으로 더 탁월해질 수 있는 분야가 있다.
개인적인 사례가 떠오른다. 중학생 때 동네에 처음 코인노래방이 생겼다. 같이 노래방에 다니던 친구는 몇 달만에 노래를 잘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친구와 매일 노래방에 간 나는 여전히 노래를 못 한다.노래에 비효율적일 만큼 돈과 시간을 투자한다면, 나름 잘 부르게 될 것이다. 그렇대도 내가 성시경처럼 노래하게 되지는 않는다.
반면 학창시절 벼락치기에는 비교적 적은 노력을 들였다. 고생은 했지만 한국 수험생에게 요구되는 수준의 자기착취는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숙제를 해가는 게 나처럼 안 되는 애가 없었다. 하지만 성적은 그럭저럭 받아냈다.글쓰기에 대해서도 그렇다. 미리 계획하는 게 안 돼서 글쓰기 대회가 있을 때면 일단 책상에 앉아서 고민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면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생겼고, 이런 표현을 쓰면 멋지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자질과 특성, 조건과 고유함이 있다. 무작정 정해진 기준에 맞추려 삶을 착취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노오력' 신화는 신화일 뿐이다. 크리에이터 이연 작가는 이런 이데올로기와 삶의모순을 젠가에 비유했다. 젠가를 하다보면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빠지는 벽돌이 있다. 아무리 공을 들여도 무너지고 마는 벽돌도 있다. 모든 사람에겐 자신의 벽돌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마다 재능이 다르다. <소울>에선 그것을 '불꽃'에 비유한다. 그 고유함을 이해하지 않고 무작정 열심히 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는 비효율적인 곳이다. 그런 사회는 패스트 팔로워가 될 수는 있겠으나 곧 한계에 직면한다. 오류와 비효율이 누적되고 서서히 침체될것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불만이 많아지고 갈등이 증폭될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꾸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은 서로를 미워하게 된다고."
우리가 살아있다면
영화 <소울>은 그런 발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나 다울 것도 없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소중하다. 좋아하는 걸 찾으면 좋겠지만, 불꽃 없이 살아가는 모든 지루하고 남루하고 반복되고 지겨운 삶도, 우리가 살아있다면 아름다운 것이다. <소울>에서 온갖위대한 철학자와 과학자, 예술가를 흘려보낸 끝에 '22'가 찾아낸 삶의 의미는 나뭇잎이었다. 죽음으로 상징되는 운명을 거스르며 온갖 수난 끝에 생을 되찾은 '조'는 가장 가치있다고 믿었던 재즈에 권태를 느낀다. 그가 도달한 결론은 일상의 아름다움이 삶의 의미라는 것이다. "바다? 네가 있는 곳이 바로 바다란다"
꿈꿔왔던 재즈 공연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적 부모님과 함께 보낸 시간, 자전거 타며 바라보던 하늘, 맛있는 파이를 먹었을 때의 기쁨, 아이들에게 연주를 가르치던 시간, 길거리에서 부모님과 노는 아이부터 카페에서 수다떠는 사람들같은 일상생활 하나하나까지. 행복이 거기에 있음을 깨달은 '조'는 지구통행증을 '22'에게 돌려주기로 결심하고 피아노를 연주하여 생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간다.
거창한 꿈과 성취에 대한 강요는 생산성 향상을 위한 자본주의 시대의 논리다. 생명은 살아가는 것에 가치가 있다. 삶을 막는 무언가, 가령 돈과 성취에 대한 집착을 떠나 이파리 하나 사랑하면서 생명이 살아간다면 그 자체로 사람은 위대하다.
모두에게 좋아하는 분야가 있을 것이다. 불꽃을 발견하지 못했대도, 어딘가에는 당신의 벽돌이 있다. 그걸 찾지 못한 삶도 소중하고 아름답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다보면, 그 고유함과 탁월함을 세상이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소중하다는 걸 깨달으면 타인에게 다정해진다. 그렇다면 화낼 것도 없지만. 화가 날 때도 있다. 거창한 꿈이 없어도 괜찮고, 성취의 의무도 없는 삶이라면, 원래 별 거 없는 삶이라면. 우리는 그저 서로에게 더 다정하면 된다. 문제아 22가 미용실 사장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삶의 많은 문제를 풀어내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