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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생끝에골병난다 Aug 13. 2023

가사 좋은 노래들, 잘 살고 싶다는 생각

자우림. 노브레인. 김동률. 백예린

✒ 가사 좋은 노래에 대한 잡문


1. 모닝왈츠. 자우림


암담했던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즐겨 듣던 자우림의 <모닝 왈츠>를 다시 들었다. 제목처럼 아름다운 노래다. 아주 오랫동안 푹 잠들었다가, 가사처럼 좋은 아침의 어떤 날 깨어나고 싶다. 코로나 시국에 발매된 곡이어서 그런지, 아침에 대한 노래지만 밤에 들을수록 첨예하고 슬픈 곡이다.

김윤아의 다른 곡 <봄날은 간다>가 봄노래인 척 하는 가을 노래인 것처럼, 실은 아침을 노래한다며 밤에 대해 이야기하는 음악임이 분명하다. 가사는 좋은 아침이 왔으니 눈을 뜨자고 말하지만, 등장하는 단어는 슬픔, 눈물, 밤 같은 것들이다. '밤은 슬픔으로 덧대어, 눈물과 함께 어둠으로 흘려보내자'는 내용에서 비장미가 느껴진다. 어두운 밤에 듣는 아침의 왈츠일수록 그 대비가 도드라지는 법이다.

몸과 마음이 끝없이 침해당하는 군 생활을 보내다보면 지금의 고통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괴로울 때가 많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전역보다 죽는 게 빠를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자유를 빼앗긴 채 신념에 적대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노랫말처럼 아직 바람이 차갑다. 반복되는 '이제 일어나 좋은 아침이야'라는 가사는 불확실한 삶을 마취하는 주문처럼 들린다. 경험으로 학습한 유일한 진리는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다. 올 것 같지 않던 날들도 다 왔다. 이 노래를 처음 듣던 무렵 나를 괴롭혔던 수능도, 코로나도 모두 끝났다. 어차피 견뎌야 할 시간이라면, 자신을 고양하고 이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며 지내고 싶다.


사회에서라면 읽지 않았을 종류의 책들을 읽는다. 예쁜 음악을 듣고, 주말에는 영화를 보고, 목욕을 하고 영내 카페에 찾아가서 농도 깊은 휴식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괜찮은 사람들에게 괜찮은 태도로 대하려고 애쓴다. 그렇게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됐다는 걸 인식할 때마다, 나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확인하고 보람을 느낀다. 반 강제로 후반기학교 소대장을 맡았을 때는 규율을 강제하는 대신 다정하고 탈권위적인 태도로 동료들을 대하려 했다. 권위적인 태도의 다른 소대장들보다 소대원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고 과분한 지지를 받았다고 생긱한다. 그때 정말 좋았다. 결국 나 또한 사회적 맥락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라, 주위의 인정을 받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시간이 해결하지 못하는 악운은 없다. 아침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어두운 시절의 등불로 삼는다.



 장마도 폭풍도 불볕도 지나간다고
 그것들이 없이는 강해질 수 없다고
 아름답고 고귀한 것들은 다
 온몸으로 견뎌내며 태어나는 거라고

 난폭한 자들은 악을 쌓으며 자멸해가고
 비바람 속에서도 여름 꽃은 우뚝하니
 이 아침, 꽃들이 전하는 격려를 담아
 그대의 안부를 타전한다

(여름 꽃은 우뚝하다, 박노해)




2. We're all in the dance



근사한 음식을 먹고, 새로운 곳에 가고, 편하게 쉬고 싶은 욕망은 악한 마음이 아니다. 그 방법을 착각하게 만들어 사람들을 착취하는 사회가 악하다. 협력해야 할 주변 동료들의 것을 빼앗으며 좋은 삶을 스스로 망치는 비굴한 태도가 악하다. 자기는 착실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성공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잘 살지조차 못하고 있다. 잘 사는 것은 잔잔하고 아름답고 조화로운 이런 노래를 닮았고, 그래서 아름다운 노래를 들을 때면 정신이 고양된다.


이 곡은 자신을 고양시키기 위해 듣는 아름다운 노래의 일종이다. 유튜브 플레이리스트에서 우연히 듣게 된 노래다. 잔잔하게 예쁜 노래를 듣다보면 정신이 고양된다. 자기 색채를 지키면서 잘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도 그렇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좋은 삶을 향한 타인의 열정에는 강한 전염성이 있다.


이 노래를 처음 게 된 유튜브 클립의 공원 사진이 근사해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깨달았다. 오늘 오월이구나.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가는 듯하다. 일에도 적응했고, 마음이 잘 맞고 대화가 즐거운 사람들도 많이 찾았다. 시간 날 때마다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조금이라도 단어장을 들여다본다. 입대 전보다 영화나 책, 노래도 많이 접하는 중이다. 훈련소 때 했던 고생이 벌써 아득하다. 원래 현재에 충실한 '카르페디엠'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후회와 걱정이 지병인 사람들은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압도적 체험 앞에서야 현재를 살게 된다.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대신, 현재를 버티거나 누려야 하는 상황에 던져지고 나서야 현재를 사는 중이다. 물론 군대에는 나를 환멸로 이끄는 것들이 더 많다. 징병제 망해라!



3. 아름다운 세상. 노브레인


정부는 잼버리 행정 실패를 시민 동원과 '아이돌 징발'로 해결했다. 여당의 대표는 "잼버리를 IMF 금모으기 정신으로 해결하자"라고 했다. 한국은 민간 동원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동양의 정서가 원래 이런 것인지, 징병제라는 한국의 특이한 제도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이러면 안 되는 것이다. 미담으로 포장된 IMF 금모으기 운동도 사실 자본과 국가의 실패를 시민 동원으로 극복한 사례다. 한국이 주입하는 강제 징병의 신화부터, 이번 잼버리 수습까지 같은 식이다. 우리가 현대에 진입한 국가라면, 시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국가라면, 이러면 안 되는 것이다.


국가에겐 국민을 동원할 자격 자체가 없다. 영화 <1987>을 리뷰한 글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국가가 우리의 노동력을 사용하고 싶다면, 노동법에 따라 계약할 수 있을 뿐이다. 동원할 수는 없다. 국민은 국가에 예속된 존재가 아닌 국가와 동등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탈현대를 말하기 전에 근대적 개인주의부터 똑바로 해야 한다'던 문유석 판사의 지적을 떠올린다. 시간이 흘러도 극복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 작가는, 자신의 책이 21세기의 청년들에게도 읽히고 공감 받는 현실이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90년대의 사회 비판 펑크가 여전히 통한다는 사실도 비극이다. 90년대 후반 형성된 한국 사회의 후기 산업화 시대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끔찍하고 참혹한 세계를 묘사하며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말하는 가사는 미군의 베트남전 만행을 묘사하며 'what a wonderful world'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영화 <굿모닝베트남>의 역설을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지'라는 가사는 파편화된 개인만 남겨진 채 자본주의에 패배한 연대와 투쟁의 시대를 조명한다.

돈은 사람을 위한 수단일 뿐인데, 돈과 사람의 관계가 뒤집힌 인간 소외의 시대. 국가 폭력의 동원이 당연시 되는 악몽 같은 세상을 감추기 위해 동원되는 '심리적 G8', 경제 성장 같은 구호들을 비꼬며 노래가 끝난다.



아 아름다운 세상 / 너무나 아름다워라 / 사람과 사람 / 사람위에 돈 / 무슨 소리야 / 우린 지금 잘 살고 있잖아 와!



4. 잔향. 김동률



첫사랑에 대한 되새김은 정말 소년만의 증상인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크게 앓은 적이 있다. 성별 탓이라기보다는 이별에 서툴고 지나간 사람을 오래 곱씹는 성격 탓일 것이다. 5년 동안 한 사람을 잊었다. <노르웨이의 숲>의 유명한 문장처럼, 벚꽃이 피면 어금니를 꽉 깨물고 통증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누구를 소개해준다던 제안을 거절했던 이유는 그 친구가 생각나서 죄책감이 생긴 이었다. 가끔 연애를 하더라도 깊게 빠져들지 못했던 이유는 그동안에도 그 친구를 오래 사랑해왔기 때문이다.


살아남는 일에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랑에 수반된 모든 감정이 잊혔다. 수험생의 상사병에는 성적표보다 좋은 처방이 없다. 그러다가도 이 노래를 들을 때면 고통스러워 했던 시간이 생각난다. 그 감정이 재현되지는 않는다. 무언가 어두운 것이 오래 축적된 듯 무거운 가사와 목소리. 경박하지 않은 연주를 듣다보면, 시간의 흐름이 역행해서 내 주위를 흐르는 듯 다. 노래를 들으면서 얼핏 생각났다. 이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살아왔던 것 같다. 언젠가 그 친구의 무의식에 닿는다면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널 이만큼 좋아했어"하고.




5.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 백예린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에는 우물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살아가다 보면 한 번은 빠지게 될 깊은 우물. 그런 우물을 은폐하지 않는 예술이 좋다.


성장과 상실이 동의어라면, 슬픔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의 몸이라는 자연마저 훼손하고 이용하는 자본주의는 자연스러운 슬픔 역시 베어버린다. 쾌락과 조증을 양산해 인간 기계를 완성한다.


음원차트에는 밝은 사랑과 성공의 노래가 가득하다. 긍정과 쾌락이 가득한 예술은 가볍게 즐기기 좋지만, 거짓말이기도 하다. 거짓은 가볍게 떠오르고, 진실은 무겁게 가라앉는다. 긍정과 쾌락의 노래가 세상을 채울수록, 우리의 내면에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깊은 불안이 자리잡는다.

그 책의 이름은 <노르웨이의 숲>, 옛 이름은 <상실의 시대>였다. 백예린의 노래는 그런 상실의 시대를 위한 해답도 제시한다. "그러니 우린 손을 잡아야 해.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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