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생끝에골병난다 Aug 15. 2023

주식 책의 거짓말 / 현대인이 우울한 이유

서점에서 시대 읽기


서점에서 읽는 시대


서점에 가면 시대가 읽힙니다. 몇 년 전에는 베스트셀러의 키워드가 '퇴사' '욜로'였다가, 곧 '주식'이나 '부동산', 또 '자기계발'로 바뀌었습니다. 경제가 성장하고 사회가 진보하며 개인에게도 삶을 고민할 기회가 생긴 탓입니다. 청년의 관심사가 생존에서 생활로 바뀌었고,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말처럼 '자기 방식대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사람들은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 주체성을 실현하고 싶었고, 그럴수록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하락장에 접어들며 그것도 잘 안 되니 자기계발, 처세 등을 공부하며 자기 착취로 빠져드는 것이 근자의 흐름입니다.

저도 군대에서 주식이나 금융 책을 꽤 읽었습니다. '자본주의를 이해하라.' 책들의 논리는 알겠지만, 맹점도 많아 광신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1. 현실을 이해해야죠

현실의 시장은 주식투자 책 속의 별천지와 다릅니다. 한국 주식 시장은 개미에게 그다지 상냥하지 않습니다. 5년 이내 돈을 벌어 나오는 개미 투자자는 5%에 불과하다는 보도가 있었죠. 코로나 당시의 상승장에서도 신규 계좌의 평균 수익률은 13%였고, 20대 남성에서는 3%였습니다(NH투자증권). 하락장에서는 어떨까요?

금융세력은 월급쟁이, 청년들에게 주식을 부추깁니다. '벼락거지'가 될까 불안한 노동계층이 월급을 헐어 주식을 삽니다. 종종 빚도 냅니다. 자본이 부족할수록 위험한 투자를 하겠죠. 내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큰 손'들, 내부자, 작전 세력이 바람을 일으키곤 노동계층의 푼돈을 챙겨 달아납니다. 대부분의 이런 사례에서 개미를 보호해 줄 주체는 없습니다. 자본주의니까요. 자본주의를 이해해야죠. 다음 세상에서 천벌이나 받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안전하게 주식을 하려면 생활비, 여유자금을 떼어놓고 장기 투자를 하는 게 좋겠죠. 그런데 이 방법은 모두에게 적용할 수 없습니다. '매년 천만 원 이상을 정기적으로 투자하라, 남은 돈으로 다른 주식을 사라.' 월급쟁이에게 권하는 이런 투자법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한국인 평균 월급이 260만 원입니다. 당장 집값 내고 전기료 난방비 각종 비용 다 떼고 나면요. 그럴 여유 나지 않을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전 국민 부자 만들기'라는 구호기 헛헛한 이유입니다.

물론 인간다운 생활을 포기하는 방법도 있죠.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소비를 모두 끊어 내핍 생활을 하는 방식입니다. 근데 그럼 도대체 뭘 위해 돈을 버는 거죠? 그게 물신숭배죠.

2. 일을 하는 당신은 노동자며,


영화 <기생충>의 이미지


금융 책들은 왜 노동 천시를 기본으로 깔고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를 이해하라. <존리의 금융문맹 탈출>을 비롯한 주식 책들이 일관되게 역설하는 바입니다.

자본주의에서 가치 창출은 말단의 노동자들이 합니다. 단지 투자라는 중간 이전만 하면서 이윤을 챙기는 이들은 사실 무임승차자입니다. 모든 사람이 투자이익만 추구한다면 그 사회는 망합니다. 일 없이는 일상이 없고, 일을 하는 당신은 노동자며, 노동을 천시하는 세상은 불행한 세상입니다.


대학생 때 벼락치기를 한다고 자주 밤을 새우곤 했습니다. 새벽 3시에 산책을 나가보면 공원에는 쥐 시체가 있고, 편의점에는 웬 중학생이 문제집을 끼고 컵라면을 먹고 있었습니다. 제 컵라면을 계산해준 알바생은 또래로 보였습니다. 새벽 4시에는 노인들이 거리 청소를 했고, 5시에는 식당 종업원들이 장사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여기가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아닐까요. 이런 사람들의 새벽이 찬란한 자본주의 시대를 지탱하는 토양입니다. 그런 강토의 위대함에 입 맞추며 경배하고 싶다가도, 대체 우리는 뭘 하고 있는가 싶기도 했습니다.

노동은 분명 고된 일이고 그로부터 해방될수록 좋겠지만, 노동의 고됨이 천함으로 여겨지고 해방의 방법이 사적인 투기에 달려있다면 그보다 끔찍한 세상이 있을까요? 98%가 불행하고, 부자가 되지 못한 그들은 금융문맹이니까 삶이 좀 비참해도 되는 세계관에서, 나는 예외인가요? 내가 노동자인데, 내가 찍은 주식이 막 올라서 부자 될 거란 착각으로 노동을 천시하는 세상에서는 우리부터 불행해집니다.

3. 또또또 '자기계발 타령'

불행은 게으름의 탓이다. 너만 '노오력' 하면 부자가 된다. 노동자가 되도록 가르치는 교육 말고 금융과 처세를 따르라. 자기계발서의 논리죠. 자연선택의 결과 인간은 종교를 믿는다는 형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가 현대의 종교라면 이런 책 쓰는 사기꾼들은 제사장이죠.

세상이 꼭 경제학의 숫자로 강퍅하게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모든 게 세상 탓은 아니겠지만, 모든 게 당신 잘못도 아닙니다. 경제학자들의 예측은 자주 틀렸고요, 존리가 사기꾼이었던 것처럼 이런 책 쓰는 사람들은 그다지 깊이가 있지도 않아요. 자극적인 표현과 논증 없는 단언으로 인간의 생존욕구를 건드려 돈 벌 궁리 뿐이죠. 세상은 양 날개로 날아왔습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 책도 읽어야 나머지 반쪽이 보입니다.

교육에 대한 인식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단지 명문대 간판 따고 취업하는 게 교육 목적의 전부가 아닙니다. 좋아하는 걸 찾고, 자유를 억압하는 도처의 권력에 저항하고, 살고 싶은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교육이 필요합니다. 무언가를 익혀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합니다.

돈 공부의 필요성을 부정하자는 게 아닙니다. 저도 돈 모을 때 재미를 느끼고 금융상품도 보유합니다. 루쉰의 전집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세상을 바꾸려고 해도 일상이 비루하면 그걸 유지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개화기 중국의 지식인이었단 루쉰의 책에는 그런 메세지가 자주 나옵니다. 좋은 이상이 있다한들 가족이 불행하고 자식이 굶어가는데 무슨 소용인가요. 화자인 동양 남성의 맥락에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돈 공부도 하고 경제적 독립도 추구하되, 이런 책의 주장은 전부 참고할 만한 것이 아니며, 보다 진실에 가깝고 선하며 아름다운 인식에 다가가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돈을 자랑하기보다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권유드립니다. 어느 정도의 돈은 있어야겠죠. 행복과 소득은 중산층이 될 때까지는 비례합니다. 다만 돈을 갈망하고 집착하며 일상의 기쁨과 인간 관계에서 멀어지는 삶 역시 행복과는 멉니다. 반 쪽짜리 진실이 담긴 자기계발서처럼 말입니다.




현대인이 우울한 이유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의 데뷔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제목대로 파괴적인 소설입니다.

소설에는 거대악이 잘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책이 새로운 세대의 문학이기 때문입니다. 빌딩이 커질수록 개인은 작아집니다. 우리는 거대 도시의 모래알갱이입니다. 누가 악인지도 알 수 없고, 투쟁의 방향성도 잃어버린 세대입니다.

분노를 집중시킬 악이 없으니 개인의 저항에도 힘이 모이지 않습니다. "저들을 타도하자!"라고 말하면, "그러는 너는 깨끗해?" "저들이 진짜 나쁜 게 맞아?" "그런데 남들 일할 때 넌 뭐하는 거야?" 같은 반응이 따라붙습니다. 비극은 그런 반응들도 마냥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는 국가나 종교가 우리의 삶을 정해주지 않습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말로 자유에 내던져진 현대인의 삶을 예견했습니다. 나이키의 심볼 'JUST DO IT'은 섬뜩한 진실을 함의합니다. "하고 싶은 걸 해. 성취로 증명해. 너의 삶을 네가 책임져야 해."

남들이 각자의 길에서 나아갈 때 우리는 도태되는 것만 같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불안을 느낍니다. 그리서 현대적 정신질환인 불안장애를 앓는 사람들은 병실을 빙빙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소설에는 방향성을 잃고 질주하는 'k'가 등장하고, '북극'으로 상징되는 안정을 찾아 떠나는 '유디트'가 나옵니다. 그 밖에도 수많은 방황하는 인생들이 등장합니다. 그 방황은 우리가 감춰둔 삶이지만, 분명 세계에 실존하고 있습니다.

누가 악인지도, 누구와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사람들은 우울합니다. 우울은 자본주의에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강박적인 희망과 쾌락을 배양합니다. 우울의 나른한 이완은 죄악입니다. 질병이고 퇴치 대상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뭐라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착취하고, 후기 자본주의는 우리의 삶이 부숴진 폐허에서 작동합니다.


마라의 죽음. 다비드

"왜 자살하지 않는가."


이 책은 실존하지만 우리가 감춰둔 것들을 끌어내는 작품입니다. 이를테면 현대인의 권태와 우울. 그것에서 비롯된 죽음 충동과 에로티시즘.

다비드의 유화 <마라의 죽음>으로 시작해 <사르다나팔의 죽음>으로 끝나는 구성은 우리가 묻어둔 자살의 역사를 드러냅니다.

자살은 인간이 하는 겁니다. 동물은 하루라도 더 살아보려 발버둥치고, 기꺼이 추해집니다. 인간만이 존재의 의미를 고찰하며 스스로의 삶을 압축할 수 있습니다.

류보선 평론가는 '나는 전사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내가 죽고싶을 때 죽을 것이다'라는 다다이스트의 구호로 소설의 사상을 설명합니다.

죽음은 인생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인생이 영원히 이어진다면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겁니다. 우리가 죽기에 이야기에는 마침표가 찍힙니다. 인간에게는 주어진 시간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채워야할 의무가 생깁니다.

그리고 인간이기에,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오랫동안 국가와 종교에 예속된 존재였기에 우리의 생명은 '큰 타자'의 것이었지만, 정말 신이 죽었다면, 우리에겐 자신을 파괴할 권리도 있습니다.



이 책이 흥미로운 지점은 죽음 찬미 이면에 현대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작품에는 자살이 유일한 선택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작품에서 자살을 택하는 여성들은 모두 깊은 관계로부터 단절된 존재였습니다. 그녀들은 단지 욕망의 대상이었지 사랑의 주체가 아니었습니다.

국가에게는 개인의 죽음을 금지할 권한도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죽음이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 반하는 일이라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택하는 사회에는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건 존엄을 완성하기 위한 죽음이 아니라, 사회적 살인입니다.

누군가 말해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있어서 살만하다고. 당신이 없으면 나는 슬플 것이라고. 국가는 죽음을 금지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들이 죽지 않도록 유도할 수 있었습니다. 살 방법과 이유를 제공하는 선한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죽음을 권장하는 '나', 방관한 남자들, 텅 빈 영혼을 채우려 헛된 욕망으로 새하얀 '북극'을 찾던 유디트. 하얀 백지를 두려워하며 강박적으로 무언가를 그리던 미미.

이 소설이 여전히 읽힌다는 것은 세계가 여전히 현대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라면, 우리는 언젠가 '나'를 마주칠 것입니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유디트나 미미처럼 말입니다.



이전 22화 인생에 의미가 없을 때. Vita activa!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