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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생끝에골병난다 Aug 21. 2023

주호민만 매장하면 끝입니까?

지옥이 된 며칠의 한국, 푸코와 루쉰

<지옥이 된 며칠의 한국은>

인스타그램 @garbageidea


또 한 명이 매장 당하고, 세상은 그대로고.


주호민 씨 관련 논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이런 논쟁에 염증을 느끼며 관련 보도를 피해왔다. 잘잘못을 따지는 일에 말을 얹을 생각도 없다. 한국의 여론이란 항상 이런 식이다. 연예인을 비롯한 유명인사 한 명을 매장하는 일로 구조적 해결의 책임을 회피하고, 진짜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비난을 피해간다.

사회 초년생 교사의 비극 이후에도 우리는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를 흐리고 있다. 정부는 의도적으로, 대중은 무심결에, '악당 만들기'에 골몰한다. 또 한 명이 매장 당하고, 세상은 그대로고,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피해자가 발생할 뿐이다. 책임은 개인이 아니라 조직이 지는 것이다. 책임을 지는 조직만이 개인의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그런데 책임자조차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 지금 우리의 국가다.



악마를 양산하는 '지옥'


빈발하는 흉기 난동 테러로 주변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가족들은 '군대가 가장 안전할 거야'라며 웃지 못할 농담을 건넨다. 언제 어디서 공격 받을지 모른다. 일상의 신뢰부터 무너지고 있다. 흉기 난동을 하는 자들은 분명 악마다. 그런데 개인을 관계로부터 고립시키고 불안과 극한경쟁으로 떠밀고 좌절시키는 사회가 지금도 이 악마들을 양산하고 있다. 악마를 키우는 곳이라 이곳의 별명은 '헬조선', 그러니까 지옥이다.

사회적 비극이 발생했을 때, 악당을 만들어 비난하는 일은 두뇌를 편하게 한다. 복잡한 사회문제를 직시하고, 개혁을 위한 지난한 논의를 반복하고, 일상의 메커니즘을 개조하는 피로한 일 대신, '이해할 수 없는 악'이라는 직관적이고 본능적이며 익숙한 서사를 세운다.

사회문제는 쉽게 풀 수 없기에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대화하는 법을 잊은 것이 아닌가 한다.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 박사는 21세기를 효율성과 나르시시즘에 입각한 자기 착취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귀찮은 대화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은 mbti가 대신한다. 대화와 타협의 장이어야 할 의회는 어떤가. 얼마 전 야당 대표의 구속영장 실질 심사가 있었다. 밤새 기각을 기도하던 야권 지지자들과 인용을 바라던 여당 지지자들의 풍경. 너무 익숙한 꼴 아닌가.


주기적으로 나라의 운명을 모조리 판사한테 맡기는 것이 어떻게 민주주의인가. 법관이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지만, 그가 양심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판사도 성적 순으로 뽑혔을 뿐이다. 민의와 타협의 산물로서의 정치가 아니라, 판사 한 명의 판단에 맡기고 각자 '기도 메타(전략)'에 들어가는 게 지금 우리 민주주의다. 천천히 따져보고 대화하는 법을 잊은 탓에 가짜 뉴스가 횡행하고, 극단으로 빠지는 정치에 염증을 느껴 시민들은 광장을 떠난다. 문제의 정치적 해결은 불가능하고, 텅 빈 광장을 기득권이 점유한다.


대신 역행하는 우리의 공론장은 당장의 기분을 개선하기 위해 혐오를 호출한다. 권력은 이것을 기회로 삼아 국가의 권능을 늘리려 한다. 주호민 사건을 구실로 장애아 혐오를 하고, 새만금 잼버리 부실 행정을 구실로 지역혐오를 하고, 흉기난동 사건을 구실로 정신질환 혐오를 하지만, 아무도 이런 시스템을 만들고 방치하며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을 비판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여론은 강약약강이다.

'나락' 보내기의 시대정신


가장 큰 비극이 있던 날로 돌아가보자. 봄날에 여행을 떠나던 수백명의 학생들이 실시간으로 죽어가는 장면을 전국민이 목격한 후, 우리는 무엇을 바꾸었는가. 사회적 안전 의식을 강화하고, 기업의 비윤리적 경영과 정부의 무분별한 규제완화를 막아냈는가? 유병언 하나를 매장하는 일에 에너지를 소진하고는 똑같은 참사를 반복하지는 않았는가? 비슷한 일이 타워크레인에서, 제빵 공장에서, 할로윈 거리에서, 잼버리 캠프에서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가?

비단 거대한 이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터넷 댓글에서는 연예인의 구설수를 관전하며 '나락 갔다'라고 조롱하는 문화가 유행처럼 자리잡았다. 예술인과 중소기업의 저작권 피해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가. 구조적 해결을 위한 논의 대신, 유희열 씨나 아이유 씨를 '나락' 보내고서는 다들 만족하고 문제에 관심을 꺼버린다. 그들이 정말 잘못을 하긴 했는지, 그렇다면 얼마나 책임져야 할지 관심 가지는 사람은 없다.


이번 서이초 교사의 비극을 대할 때도 그렇다. 교사의 노동권과 직업윤리 재설정에 관한 합의 대신, 많은 이들이 주호민 씨를 '나락' 보내는 일에 만족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따져보고 그만큼만 책임지면 된다. 그 입증 책임 역시 그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에게 있다. 우리 꼭 이렇게 피곤하게 살아야 할까? 누군가를 '나락' 보내는 마음은 사실 해결을 바라기보다 인정욕구의 표현 아닐까.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것은 고대로마제국 때부터 이어진 노예 관리 비법이다. 주인이 노예를 부릴 때, 노예 사이에 차등을 두고 서로 다투게 . 그때부터 노예는 뭉쳐서 주인과 싸우지 않는다. 대신 서로를 고발하며 주인에게 잘 보이려 애쓰기 시작한다. 지배자가 피지배층간의 갈등을 유도하여 통일적인 저항을 방해하는 전략이다. 연애인을 '나락' 보내며 즐거워하는 이들은 책임져야 할 사람들에게 이용 당하고 있을 뿐이다.


당신이 예수나 부처가 아닌 이상 우리는 매순간을 성자로 살 수 없다. 사람은 결국 사람이라 모두가 조금씩의 악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사람이니까 그렇지. 사람이니까 도둑질도 하고, 거짓말도 하고.' 잘못을 했다면 그만큼의 비판만 받아야 한다. 막상 찾아보면 매장 당할 만큼 잘못한 사람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정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다. 그들은 책임지는 대신 책임을 묻는다. 


푸코와 책임의 권력

이번 비극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위계질서의 약화가 아닌, 사회적 위계질서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학생 기본권을 보장하는 조례 탓을 하는 것은 악의적인 논점일탈이다. 나아가 이는 일선 교사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시스템적 보호의 책임을 회피하는 사회가 방조한 교사 노동권의 문제다. 학생이 학교에서 시험 성적 탓에 구타 당하고 촌지를 내던 전교조 이전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일부 학부모의 '극성 민원인'화, 강남이라는 지역성의 문제, 한국 교육의 계급재생산 등 복잡한 문제들을 톺아봐야 한다. 원인 진단이 틀렸으니 해결책도 엉터리다. 이런 교육과 이런 세상을 만들고 방치하고 권장해온 정치는 책임을 질 대상이지 '엄정한 수사' 같은 걸 명령할 입장이 아니다.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판옵티콘'


저명한 철학자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감옥의 규율, 죄수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 방법이 사회적으로 확산된 형태'가 근대 사회라고 규정했다. 근대 이후의 권력은 군중에게 감시 당한다는 생각을 심어놓는 판옵티콘의 원리로 작동한다. 근대 사회는 "감시 작용이 멈추더라도 그 효과는 지속하고", 폭력 행사에 대한 책임을 면피하면서 권력의 완벽한 상태를 강화하는 감시사회이자, 개인에게 신체에 대한 규율을 길들인 규율 사회이다. 권력은 인간의 몸을 '인간 기계'처럼 생산적으로 변형시켜 '순종하는 노동자의 신체'를 만들어냈다. 우리의 몸은 "복종시킬 수 있고, 이용할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고,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부품이 되었다.


판옵티콘의 권력은 익명적이고 자동적으로 작동하며 사람들을 통제한다. 사람들은 저항하는 대신 서로를 감시하고, 질서를 내면화한다. 이렇게 권력은 순응하는 육체를 생산해내면서 생산력은 증가시키고, 더 강한 권력을 창출해내고, 군중을 쉽게 통제한다. 나아가 <감시와 처벌>을 번역한 오생근 교수는, SNS의 발달로 모든 발언과 행동이 기록되는 현대 사회를 '디지털 판옵티콘 사회'로 명명했다. 현대 사회는 "모든 개인들의 생각과 행동이 무차별적으로 기록됨으로써, 개인에 대한 관찰과 감시의 일상화가 이루어진 대중사회"라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자발적 감시와 통제는 더 촘촘하게 이루어진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우선 자신의 과오와 한계를 성찰하고 더 선한 상태에 다가설 정도의 책임이 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매장 당할까봐 걱정해야 할 책임은 없다. 나아가 푸코는 권력이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행사되는 것이라고 했다. 권력은 특권 계급이나 국가기관의 소유물이 아니라, 다양한 톱니바퀴들이 모세관처럼 확산되어 맞물려 돌아가는 그물망이라는 것, 촘촘한 '권력관계'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생활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자신에게 권력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이런 세상을 전복해야 할 책임이 있다.


내면에 복종을 심어놓는 권력의 분할 통치에 불응하고, 저항하고 주체적이며 자유로운 존재들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약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세상. 루쉰의 광인일기에 나오는 서로를 잡아먹는 식인의 세상, 그게 지금 우리 사회다. "아직 사람을 잡아먹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까?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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