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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생끝에골병난다 Oct 01. 2023

세상이 우리를 죽이려 들 때

이게 뭐냐면


침상으로부터의 사색


"겨울의 싸늘한 냉기 속에서 나는 나의 숨결로 나를 데우며 봄을 기다린다." 온화한 날씨 탓에 더 비현실적인 글처럼 느껴졌다. 대학 과제 탓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처음 읽은 봄이었다. 엄혹한 독재의 시대, 사형수의 몸이었음에도 머리로 배우고, 가슴으로 느끼고, 발로 행동하고자 한 신영복 선생의 글이 낭만적으로 다가왔다. 그때 나는 자유로운 몸이었음에도 공부보다는 천장을 쳐다보는 것이 더 흥미로웠다.


지금은 나도 어디 갇혀있다. 교도소 생활처럼 특별한 경험은 아니다. 다들 그렇듯 병원과 학교를 지나 군대에 왔을 뿐이다. 신영복 선생처럼 휴지에 숨 죽여 글을 적고 있지도 않다. 생활관 침상에 누워 브런치스토리 화면을 두드리 얼마 남지 않은 군생활을 보내고 있다. 글이 감시당할 걱정도 없다. 누가 읽어주기나 하면 다행일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시대에 사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총칼을 앞세운 탄압을 우려하는 대신, 내 글이 유리빌딩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흩어질 것을 걱정하는 일이 현실적이다.


명시적 독재는 끝났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불행하다. 우리는 아직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권리를 늘 향유하지 못한다. 자유라니, 지금도 내가 억류된(?) 방에는 스무 명도 넘는 사람들이 모포처럼 다닥다닥 접혀있다. 군대는 사색하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다. 동시에 온갖 사람들이 품은 이야기가 모이는 곳이 군대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흐릿한 뒷맛을 더듬어본다.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선생은 감옥이 최고의 사회학과 인류학 학교였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로부터 무언가를 배워서 나갈 수 있을까. 냉기 속에서 숨결로 나를 데우며 봄을 기다려야 했던 군대의 시간 동안,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접하려 노력하곤 했다. 이곳에 모인 우리들이 대중이고 민중이니까. (지금도 민중이란 단어가 쓰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애와 경쟁의 시절이지만, 진정한 공부는 교류와 공감 속에 있다고 믿는다. 시간이 남으면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노랫말을 곱씹었다. 그 안에 담긴 이야기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단체 생활이지만 곁에 있는 사람의 체온을 미워하지 않으려 애썼다. 타인의 인생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지켰다. 공평한 시간의 흐름 아래 부모님의 품을 떠나와 자주 비틀대는 내가 또다시 사랑의 품에 귀의하기를 바라면서. 익숙했던 책상머리를 떠나와 헤메는 조난자가 다시 한번 공부의 장에 닿기를 바라면서.




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치열하게 살아야 평범해지는


사적기억을 이야기하겠다.


사회학과에 입학하고 받은 첫 번째 과제는 한국 사회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는 일이었다. ’치열하게 살아야 평범해지는 나라'. 긴 고민 없이 이런 제목을 붙였. 살아오면서 경험한 사회는 정말 그랬다. 대단한 꿈이 없더라도, 평범한 삶을 쟁취하기 위해서 평생 경쟁해야 하는 곳이 나의 조국이었다.


물론 세상에는 체질적으로 경쟁이 안 맞는 사람들도 있다. 우선 내가 그랬다. 갈등을 피하는 회피형 인간이었다. 주변 아이들을 짓밟고 경계하는 생활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주변 어른들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넌 왜 그렇게 경쟁심이 없니?” 하지만 '헬조선 최적화' 에 장사 없었. 나도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죽기 살기로 경쟁에 뛰어들었다. 옆 반 모범생 친구의 성적을 몰래 알아보고, 나보다 시험을 못 봤다는 사실에 쾌재를 부르기도 했다. 시험이 끝나고 좌절한 친구의 얼굴을 보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무언가 이상하다는 각이 들었다. 계절마다 시험이 반복되면 교실 틈에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름 모범적인 '촛불 키즈'였던 내가 동료 시민을 짓밟고 올라서는 일에 목숨을 걸다니. 지금 돌이켜보면 참 부끄럽고 시시한 변절이었다. 가속의 시대에 사색할 시간도 빼앗긴 탓이었다고 둘러대면 궁색하게 들릴 것이다.  못 자고 굶어가며 경쟁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그래도 변명하고 싶다. 한국의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은 다들 그렇게 산다고.






멀리 있으니까


다만 나는 천성이 게으른 '대문자 P' 인간이라 그리 정열적으로 살지 않았다. 종교처럼 의지하는 믿음이 있다. 인간의 뇌에는 미루다 보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끝까지 미루다가, 정말 치명적인 시점이 오면 어떻게든 해결된다. 플라시보 효과 덕분에 내 수험생활은 한가로웠다. 날씨가 좋은 날엔 학원에 가는 척 종일 노래를 들었다. 비가 오는 날엔 나가기가 싫어서 영화를 봤다. 지겨운 일상은 무언가를 은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집에서, 깃털 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그 머나먼, 진은영)



나는 안일한 인간이다. 공부를 미룬 이유도 단지 치열한 경쟁으로부터의 도피였. 갈등에 던져지는 상황이 알러지가 일어나는 것처럼 괴로웠다. 시간은 언제나 불쾌하고 공평하게 흘렀다. 아무리 노래나 영화로 도피해 봐도, 올 것 같지 않던 시험은 항상 다가왔다. 치명적인 시점에 '큰일났다 버튼'이 눌리면, 나는 그제야 카페인을 쌓아두고 새벽까지 벼락치기를 했다.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노라 다짐해 놓고 몇달 뒤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삶이 우리를 죽이려 들 때


날아오는 할 일을 허겁지겁 쳐내면서 입시를 끝냈다. 대학 생활에 대한 사전정보는 전혀 없었다. 대학교에서도 중간고사를 본다는 사실이 또다시 나를 환멸로 이끌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수행 평가와 교내 대회의 연옥을 떠나 겨우 대학에 왔는데, 여기서도 같은 굴레를 반복하게 생겼다. 아니, 더 가혹한 경쟁이 이어질 운명이었다. 친구가 주어져 있던 고향의 환경을 떠나자 대인관계도 어려웠다. 차가운 시선과 규범에 상처받는 날이 이어졌. 고작 평범한 삶을 쟁취하기 위해서 학점을 관리하고, 자격증과 어학을 공부하고, 대외활동에 나가고, 인턴을 알아봐야 했다. 공모전을 준비하고, 알바까지 다녀와야 했다. 무슨 대단한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더 큰 역경은 군대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전공과 인생에 회의를 느끼는 '대2병'이 도질 때쯤, 국가에서 나를 불렀다. 뭘 믿고 내 손에 총을 쥐여주지? 그냥 대2병을 계속 앓고 싶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기억들이 있다. 기후위기는 실존했다. 겨울에 입대한 우리는 서로의 눈썹에 맺힌 고드름을 목격했다. 여름에는 천막을 나르다가 몇 번이고 주저앉았다. 자유를 빼앗기고 법정 최저시급이 농담처럼 느껴지는 임금을 받았다. 그런 채로 '위국헌신'을 강요당하니 있던 애국심도 차게 식었다. 일과도 버거웠지만, 내 생각 위에서 자기 정체성을 강요하는 조직에 복종하는 일이 조금 모욕적이었다. 나는 다시 도피처를 찾았다. 주말마다 영화를 보고 생각을 적었다. 일과가 끝나면 노래를 듣고 책을 읽었다. 기력을 보충한다는 명목 하에 늘어져 있고 싶었지만, 피곤한 몸을 끌고 도서관에 앉았다.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은 학창 시절부터 지켜왔던 믿음이었다. 노래를 듣고, 산책을 해야 좋은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일상이 삭막하다고 영화를 보지 않으면 더 삭막해진다는 것을 늘 잊지 않았다.



슬픔이여 안녕, 잔나비


답을 쫓아 왔는데
질문을 두고 온거야
돌아서던 길목이었어

(슬픔이여 안녕, 잔나비)


역시 도피일지 모른다. 그런 도피가 고통스러운 경쟁과 버거운 노동을 버텨내게 했다. 우연히 찾아낸 노랫말은 어두운 길을 앞둔 등산객의 조명처럼 든든했다. 이를 테면 잔나비의 <슬픔이여 안녕> 같은 노래가 그랬다. 우연히 이 노래를 듣다가 탄성을 내지른 기억이 난다. 초록초록한 노래를 들으면 이성을 놓는 지병 탓이다. 서정적인 멜로디도 마음에 들었지만, 역시 가사가 일품이었다. 노랫말을 되뇌면서 한강 작가'서시'를 떠올렸다.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서시, 한강)



운명과 슬픔은 동의어일 것이다. 정주 동물이 된 인간은 어디든 머무르고 싶어하지만 정착은 불가능하다. 시간은 우주의 속도로 흐른다. 그래서 인간의 운명에는 존재적인 슬픔이 있다. 어느 시절의 자신과 아득히 멀어져 버린  깨닫는 순간이 다. 답을 찾아 떠나왔지만 질문만 남았다. 슬픔에서 떠나온 것인지, 슬픔에게 다가가는 중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슬픔이여 안녕>이라고 할 때 '안녕'은 중의적이다. 그렇겠지만, 슬프겠지만. 그런데도 살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이 이 노래의 힘이다. 기적은 기적의 확률로만 발생할 것이고, 우리는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살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가. 마음 붙일 상대가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무엇이든 사랑하는 마음에는 무엇이라도 남을 것이다. 비슷한 슬픔을 반복하더라도 운명이 빼앗아간 것들을 원망하지 않겠다.


어떤 영화를 보면서는 타인의 고통을 겪어볼 수 있었다. 모든 인생에는 비슷한 고통이 고통이 할당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 어딘가 위안받는 기분이 들었다. 가령 존 카니 감독의 <싱 스트리트> 가 그랬다.'라피나'는 무턱대고 떠난 애인과의 첫 영국행에 실패하고 돌아온다. 하지만 같은 조건이었던 '코너'의 여정에는 동행한다. 꿈이 있는 사람, 나은 삶을 아는 사람들은 비루한 현실견딜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스쳐가듯 말해준다. 꿈과 현실의 괴리를 승화하는 과정에서 배어나는 것이 예술이다. 그러니까 예술과 꿈은 동의어다. 삶이 우리를 죽이려 들 때, 화해하지 않고 돌파하는 이야기들은 나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었다. 영화의 대사처럼 '사랑만으론 힘들겠지만', 파도 치고 비바람 불겠지만. 신이 죽었다면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우리를 사랑하게 만드는 열정적인 꿈이 신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싱 스트리트




삶을 구원할 조금의 차이


매일이 형벌 같던 군생활도 지내다 보니 익숙해졌다. 인간의 적응의 동물인 탓일까. '적응하되 익숙해지지 않겠다'던 이등병 시절의 다짐은 무색해졌고, 주말이면 유튜브 쇼츠가 무작위로 제공하는 도파민에 차츰 중독되었다. 나는 그저 '시간을 날리는 소년'이 되었다는 자괴감에 시달릴 무렵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간이 남을 때면 그간 접한 책이나 영화에 대한 생각을 기록해뒀고, 이 글 덩어리들은 그것의 집합이다. 다소 정치적인 글도 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연예인은 정치적 발언에 신중해야 한다'는 인식을 밝혔지만, 인간의 의식세계를 다루는 모든 예술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시리즈의 제목도 '세상이 우리를 죽이려 들 때' 아닌가.


다양한 이야기를 접하다 보면 대부분의 서사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조금씩의 차이점이 모두 다른 감정과 결과를 만든다. 나라는 사람의 본질이 바뀌지 않기에 같은 이야기가 자꾸만 반복된다. 분명 10년 전 나의 생각은 지금의 내 판단과 다르다. 그럼에도 나는 비슷한 실수를 반복한다. 나라는 사람의 본질이 그대로라도 미묘하게 다른 순간의 선택이 많은 것을 바꿔놓는다. 결국 좋은 생각이 좋은 사람을 만들 것이다. 반복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같은 상황도 조금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다. 가령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꾸며낸 말로 승부를 보는 '남자1' 상대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반면 솔직하게 다가가는 '남자2'는 성공한다. 같은 인물이고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미묘하게 다른 선택이 완전히 다른 결과를 이끈다. <씨네21> 김혜리 기자의 문장처럼, '남자 1'은 '남자 2'의 '그때'인지 모른다. 우리는 그 남자처럼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찰나의 다른 선택으로 나은 결과를 얻을지 모른다.


좋은 생각은 좋은 책과 영화, 노래가 만들 것이다. 다시 신영복의 문장으로 돌아가자.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라 합니다. 사상(cool head)이 애정(warmheart)으로 성숙하기까지의 여정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여정이 남아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머리에서 발까지의 여행. 그 여정을 마치고 나면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책에는 움직이는 이미지가 없다. 책을 읽을 때 우리 뇌는 텍스트를 구현하기 위해 움직인다. 머리에 남지 않고 흘러가는 유튜브 쇼츠와 다르다. 이해하기 위해 충분히 공을 들여야 하는 영화도 비슷하다. TV 드라마가 불특정 다수에게 전파되는 공공재라면, 영화는 선택한 사람만 보는 예술 작품이다. 영화에는 보다 담대한 사상과 표현이 담긴다. 새로운 생각과 이야기가 움튼. 상업영화나 대중 음악에서도 새로운 생각을 발굴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함께 제작하는 아야기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이 힘을 모은 것에는 그 시대의 합의가 있다. 행간에 담긴 함의를 따져보면서 평소에는 지나쳤던 생각을 연습해본다. 그 생각이 우리를 더 나은 삶으로 이끌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마음을 고양시킨다. 좋은 이야기는 머리를 지나 마음에 닿는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울음을 삼킨다는 표현이, 울음이 가슴에서 올라온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했다. 가족, 연인, 친구, 동지. 인생의 뜨거운 순간은 반드시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런 순간을 포착해낸 이야기를 접하생활관 사람들 몰래 자주 울음을 삼켰다. 언젠가  머리와 가슴을 지난 진실이 발에 닿기를 바란다. 군대 막사에서 눈을 뜬 소년이 전역할 때쯤 나를 떠올려주면 좋겠다. '이상한 사람들 참 많았는데, 이상한 일들도 너무 많았는데, 그 사람 덕분에 버텼어.' 이런 생각을 해준다면 무의미한 삶은 충분히 의미있는 것이 될 것이다.


다시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문장이다. 그는 진은영 시인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평하며 '예술과 저항은 하나'라고 했다. 세상이 우리를 죽이려 들 때, 치열한 인생에서 잠시 도망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슬픔에 빠져보는 것도 괜찮다. 쾌락을 권장하고 슬픔을 은폐하는 시대다. 슬픔은 생산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일상은 노동과 쾌락의 반복이고, 슬픔이라는 인생의 본질을 외면한다. 그 괴리 때문에 우울이 찾아온다. 나를 감추고 시대가 요구하는 규격에 맞춰야 할 것 같은 세상에서, 이야기에 담긴 타인의 슬픔을 느끼고, 각자의 개별성을 응시하자. 우리는 시간에 쫒기기엔 너무 소중한 존재 아닌가. 내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아낸 사람이야말로 '치열하게 살아야 평범해지는 시대'의 반란군이. 좋은 이야기는 생각을 바꾸고, 바뀐 생각은 삶의 행로를 미묘하게 틀어놓을 것이다. 세상은 사람의 집합이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미래가 바뀐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하면, 그런 세상에서만 더 나은 삶도 가능하.


앞으로 우리가 만들 사회는, 아이들이 옆 반 친구를 시기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는 곳이라면 좋겠다. 꼭 사회가 정해준 ‘정상적인 삶’을 살지 않더라도, 그의 삶을 존재 자체로서 존중해주는 사회라면 좋겠다. 달라도 괜찮은 세상, 동료와 전쟁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세상, 야만적 경쟁을 방치하는 대신, 지치고 아플 때 시스템으로 지켜주는 세상.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랫말처럼, 평범한 사람이 평범하게 노력해도 ‘별일 없이 사는’ 세상. 우리가 만들 미래의 모습은 그랬으면 좋겠다. 지금부터는 나의 군대로부터의 사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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