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 2
조그만 우리 집의 특성상,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집안 사정에 귀가 트였다. 거의 매일 부부싸움이 있었다. 잊을 만하면 할머니가 찾아와 엄마와 싸웠고 어쩔 땐 큰엄마, 작은 아빠까지 찾아와 싸움을 걸고 갔다. 우리 집이 점점 기울어져 가는 동안 진짜 가장인 아빠는 무책임에 둘러싸여 몸을 숨겼고, 아빠의 가족들은 죄 없는 엄마를 공격했다.
엄마는 지쳐갔다. 집을 나가기도 했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며 덜덜 떨었다. 어떤 이유로 집을 나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체육시간에 뒷문 쪽에서 놀고 있다가 엄마가 지나가는 걸 발견하고 뛰쳐나갔던 기억은 난다. “엄마, 어디 가?” 학교에서 따라 나온 나에게 집에 간다며, 학교로 돌아가라는 말을 건넨 엄마는 정말 집 쪽으로 사라졌다. 학교가 끝나기를 간절히 기다렸고, 뛰어갔고, 엄마는 있었다.
엄마의 가출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오래 집을 비우지도 않았다. 엄마는 아주 독실한 개신교인이었고 아빠를 책임지는 것이 일종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외갓집이나 기도원에서 마음을 비우고 나면 항상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정말로 집을 나가 우리를 버렸다면 최소한 한 사람에게는 더 나은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매번 집으로 돌아왔지만 점점 속이 썩어갔고 신경질적이 되어갔다.
우리 집이 가난한 건 어릴 때부터 알았다. 젓갈 장사는 김장철만 성수기였고 평상시는 비수기 중의 비수기였다. 그래도 김장철에는 외식도 했고 천 원 이천 원쯤 받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보통 경제관념이 있는 사람이라면 바짝 번 돈을 모아서 비수기를 견딜 텐데 아빠는 돈이 모이는 꼴을 보지 못했다. 있던 보험도 다 해지했고 부모님 결혼 예물은 내 눈으로 본 기억조차 없다. 그래도 가끔 아빠를 보면 부성애가 있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대학 등록금을 모으겠다고 나를 데리고 시장 안에 있는 신협에 데리고 갔던 기억도 난다. 계좌를 만들면서 만원 씩이라도 모아서 대학 등록금 모아주겠다고 약속하던 기억도 난다. 물론 그 등록금 계좌는 얼마 못 가 해지됐다.
중학교 입학 직전이었나. 위태롭던 우리 집에 정말 커다란 해일이 밀려왔다. 정말 가게가 망하기 직전이었다. 임대료는 매달 밀렸고, 대출은 이자조차 갚지 못했으며, 일수까지 쓰고 있던 상황이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어떻게 할 거냐며 매일 소리를 질렀고 술에 취한 아빠는 코를 골며 회피했다.
때는 방학이었고 우리 가족은 한 방에서 같이 생활했다. 다른 곳으로 피할 수도 없이 나는 우리 집의 모든 빚과 집이 경매에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만 11세의 내게는 공포였다.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집 곳곳에 몰래 낙서를 하거나 침을 바르거나 코를 묻혔다. 집이 더러우면 우리 집을 뺏지 않을까 하는 어린아이의 믿음이었다.
어떻게 위기를 넘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우리는 살아남았다. 그렇다고 사정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입학식과 졸업식 땐 갈비를 먹었는데, 초등학교 졸업식부터는 갈빗집은 구경도 못했다. 졸업식에 찾아온 외할머니가 연포탕을 사주셨지만, 아직 어리고 식성 좋은 나와 동생을 충분히 먹일 만큼의 갈비는 사줄 수 없다는 말도 들어야 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나는 무슨 일을 겪든 금방 포기했고 그러려니 넘겼다. 지금의 나로서는 불가능하겠지만 지독한 가난과 불화에 물든 그때의 나는 그저 순응하기만 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우리 집은 드디어 망했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래성이 끈질기게 버틴다 한들 본질은 모래인 것을. 임대료 연체로 결국 시장에서 쫓겨났고, 가게를 닫으면서 아빠는 실직자가 되었다. 엄마는 매일 울었고 둘은 매일 싸웠다. 이 조그만 집마저 팔아야 할 위기에 나까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눈만 감으면 10평도 안 되는 이 갑갑한 집에서 더 갑갑한 단칸방으로 이사 가는 장면이 보였다.
그 시절의 내겐 좋아하는 아이돌이 있었다. 팬 활동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했었다. 물론 수시로 인터넷이 끊기는 바람에 활동은 한정적이었지만.
그 해, 답답한 마음에 친구와 함께 합동 콘서트에 갔다. 막상 가니 마음도 편해지지 않고 시간도 너무 늦어져 좋아하는 아이돌은 보지도 못한 채 친구를 두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내게 어디 다녀왔냐 물었고, 친구와 공부하고 왔다고 답했다. 엄마는 내 가방을 뒤집었고 가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팬클럽 물품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집이 망했는데 어떻게 이런 데를 가!”
웬만한 일에는 순응했지만 그 날 만큼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1만 원도 하지 않는 콘서트 관람료를 필사적으로 모은 건 나였다. 시험 끝나고 놀러 가라고 받은 만 원을 쪼개가며 모아서 마련한 돈이었다. 게다가 마음이 불편해서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는데. 억울했다.
내가 그 시간에 집에 붙어있었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이건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기껏해야 엄마의 하소연이나 아빠와 엄마의 싸움 소리나 들었겠지.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굳이 그 시기에 콘서트에 갈 필요는 없었다. 콘서트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집 밖에 있을 이유를 만들 수 있었다면 말이다.
나는 그때 처음 느꼈다. 우리 집 사정 그만 알고 싶다. 내가 어디까지 이 사정을 알아야 하는 걸까?
가족의 구성원이 가족의 일에 너무 무지한 것도 문제겠지. 그러나 미성년자인 자녀가 가정의 밑바닥까지 아는 게 정말 바람직할까? 성인이어서 같이 위기를 해쳐나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만 15세라 아르바이트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자식을 앉혀놓고 굳이?
모래성이라도 성이긴 했던 삶은 점점 무너져갔다. 청소일을 시작한 아빠는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 다시 실직자가 되었다. 내 인생의 수많은 괴로운 시절 중 가장 끔찍했던 시절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