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턴작가 Jan 13. 2023

단순한 농구 만화가 아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2023) 리뷰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내용을 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축구보다 농구가 좋았다. 처음부터 농구에 관심이 있던 건 아니었다. 엄마는 운동신경도 좀 있어야 한다며 초등학생이었던 나를 동네 체육관 농구 프로그램에 등록했고, 그게 농구와의 첫 만남이었다. 생초짜였던 나는 몇 주 동안은 공튀기는 연습과 패스 연습만 주구장창 해야 했고, 고학년 형들이 멋있게 플레이하는 모습을 구경만 해야 했다. 그들을 보며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던 나였고, 직접 경기를 뛰어보자마자 노골적인 실력 차이에 좌절하던 나였다. 그래서 농구 수업시간 외에도 시간이 나면 아파트 단지 안에 있던 코트로 가서 연습했고, 또 연습했다. 고학년이 된 나는 향상된 드리블과 슛 실력으로 드디어 형들을 누를 수 있었다. 나보다 훨씬 잘하던 형들이 내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당시에 그것만큼 짜릿한 쾌감은 없었다.


그때부터 자연스레 농구의 매력에 빠졌던 것 같다. 특히 고등학교 2학년까지는 야자를 하는 날에 공부보다 농구한 시간이 더 많았을 정도로 좋아했다. 당시 내가 농구에 얼마나 빠져있었는지 잘 알던 한 사람이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만화라며 '슬램덩크'를 한번 읽어보지 않겠냐고 권했다. 나는 슬램덩크 세대도 아니었기에 슬램덩크가 농구만화라는 것만 알고 있었고, 농구만화라서기보다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만화라서 읽기 시작한 것이 크지만, 다 읽고 나서는 어느새 그 사람보다 내가 슬램덩크를 더 좋아하고 있었다.


말썽만 일으키는 북산고등학교의 불량학생. 농구의 'ㄴ'도 몰랐던 문제아 강백호가 좋아하는 여자(채소연) 때문에 얼떨결에 농구부에 입단하게 된다. 부원들의 눈에는 그저 이상한 빨간 머리 문제아에 불과했지만 채소연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집념과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결국 북산고 농구부에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거듭난다. 슬램덩크의 내용 자체는 굉장히 심플하지만 연재 종료 이후 26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도 명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문제아에서 스포츠맨으로 거듭나며 단순히 농구실력 향상뿐만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 한 단계 나아가는 백호의 성장담과, 그 속에서 어우러지는 송태섭, 정대만, 채치수, 서태웅을 비롯한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가 현재까지 우리에게 교훈과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모자간의 화해 이야기

원작이 강백호의 성장 스토리를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전개됐다면 이번 극장판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는 그간 제일 서사가 부족했던 북산의 포인트가드 '송태섭'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선 그동안 부족했던 서사에 살을 붙여주고 싶었다는 이노우에 감독의 뜻에 공감하고, 개인적으로 비슷한 구석이 느껴지는 캐릭터라 정대만 다음으로 애정을 갖고 있었기에 그가 이번 작품의 주인공을 맡은 데에는 불만이 없었다. 기존의 슬램덩크 팬들에게 새로움을 안겨주고, 슬램덩크를 처음 접하는 관객들에게도 매력적으로 어필하기 위함이 이번 작품의 취지인 것을 생각했을 때, 송태섭을 주인공으로 선택한 것은 오히려 영리한 전략이었다고 느껴졌다.

이번에 새롭게 추가된 송태섭의 서사의 키워드는 '모자간의 화해'다. 어린 태섭은 자신과의 1대 1 농구 약속을 뒤로하고 친구들과 낚시를 떠난 형 준섭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고 울며 소리쳤고, 태섭은 거짓말처럼 그 뒤로 형을 볼 수 없었다. 슬픔과 죄책감을 동시에 떠안게 된 태섭은 농구 말고는 의지할 데가 없었다. 태섭의 엄마는 그런 그를 볼 때마다 농구 유망주였던 준섭이 떠올라 마음 아파하며, 태섭에게 농구를 그만두라고 하고 싶지만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둘의 사이는 갈수록 소원해진다. 태섭과 준섭의 생일날, 태섭과 엄마는 직접적으로 대화를 주고받지 않으며 동생 아라가 그들의 말을 서로에게 전달해 준다. 이 장면만 봐도 태섭과 엄마의 사이가 얼마나 서먹해졌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태섭은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산왕을 이기겠다는 형의 이루지 못한 꿈을 반드시 이뤄내야만 했다. 그 꿈을 이뤄내는 것이 형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는 모진 말을 뱉어냈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속죄이자, 전국 NO.1 가드 이명헌이 속한 산왕을 꺾는 것이 스스로를 증명해 내는 길이기 때문이다. 태섭은 경기 날 새벽에 자신의 진심을 담은 편지를 엄마에게 남기고 떠난다.


슬램덩크를 한 번도 보지 않은 분들이라도 정대만의 '농구가 하고 싶어요.' 장면은 한 번쯤 봤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에서 태섭이 엄마에게 남긴 '농구 계속하게 해 줘서 고마워요.'라는 내용의 편지가 정대만의 '농구가 하고 싶어요.' 대사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느껴졌다. 산왕에게 승리하고 돌아와 엄마와 쑥스럽게 화해하는 태섭은 어딘가 모르게 한층 어른스러워진 느낌이다. 그런 그에게 고생했다고, 정말 고생 많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럼에도 날 울린 건 강백호

새롭게 추가된 태섭의 서사는 감동적이었고, 그 끝도 훈훈했지만, 결과적으로 날 울린 건 강백호였다. 그 불타오르는 열정과 집념으로 볼을 사수하다가 등을 다친 것은 이미 만화로 수도 없이 봐서 잘 아는 이야기고, 태섭의 서사는 새로운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의 눈에 눈물이 맺히게 한건 백호의 등 부상 장면이었다. 불량학생 시절부터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이 플래시백으로 비치는데, 만화로는 느껴보지 못한 감동이 음악과 함께 나의 가슴을 툭툭 건드렸다. 스크린에 비친 진정으로 농구를 좋아하게 된 백호의 뜨거운 열정과 진심을 통해 나의 과거를 봤던 것 같다. 처음 농구를 시작했을 때, 슛 연습을 했을 때, 코뼈가 부러졌을 때, 시합에서 졌을 때, 이겼을 때의 모습들이 가슴속에 스쳐 지나갔다. 부상 이후 백호가 다시 투입시켜 달라고 말하는 장면은 4,50대 올드팬들에게 마치 '어이, 너 아직 젊어! 다시 일어나! 포기하지 마!'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20대인 나도 이렇게 울컥하는데, 슬램덩크 세대인 그들은 오죽했을까. 게임의 흐름을 바꾼 것도 강백호였고, 영화의 흐름을 바꾼 것도 강백호였다.

강백호와 서태웅의 하이파이브 장면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하이파이브 장면까지 연계되는 마지막 9초의 연출은 그야말로 원작초월이었다. 지금까지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3번 감상했는데, 감상할 때마다 관객들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진기한 영화적 체험을 했다. 나 또한 백호의 마지막 슛이 들어가기 전까지 손에 땀이 났고, 들리는 건 내 심장 소리밖에 없었다. 결과를 알더라도 관객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손에 땀을 쥐고 숨죽이며 보게 되는 이러한 요소가 스포츠 장르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토끼와 거북이

이번에 새롭게 추가된 서사 중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정우성에 대한 서사였다. 산왕공고의 정우성은 이름부터 남다르고 농구 실력도 최상인 사기캐다. 패배라고는 모르던 그가 북산과의 경기 전날에 고등학교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며 '내게 필요한 경험을 달라'라고 신사에 기도를 올릴 때 헤엄치던 거북이 한 마리가 고개를 빼꼼 들고 우성을 쳐다본다. 그리고 그는 거짓말처럼 북산에게 패배한다. 우성의 서사는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떠오르게 한다. 토끼처럼 자만했던 우성은 느리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북산에게 패배했다. 패배의 쓴 맛을 삼키며 복도에서 울음을 토해내던 그의 모습이 짠하게 느껴졌지만, 훗날 미국에서 태섭과 경기에서 만나게 되는 우성을 보고 그에 대한 이노우에 감독의 애정이 느껴졌다. '자만은 금물이며, 패배는 때때로 승리보다 값진 경험이 된다'라는 이노우에 감독의 메시지가 짧고 강렬했던 우성의 서사를 통해 새삼 와닿았다.

단순한 농구 만화가 아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두 번째로 봤을 때, 내 뒤 쪽에 어떤 아주머니 관객분이 앉으셨다. 그분은 영화 내내 크게, 자주 웃으셨다. 평소 같았으면 감상에 방해가 돼서 짜증이 났을 텐데, 왠지 그날은 짜증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그분은 마치 슬램덩크를 즐겁게 챙겨보던 예전 그 시절로 돌아가신 것 같았다. 그때의 추억이 눈앞 스크린 속에서 살아 움직이니 굉장히 즐거워하시는 게 웃음소리만으로도 느껴졌고, 덕분에 나도 그분의 추억을 잠시나마 공유하는 것 같아 매우 즐겁게 감상했다.

슬램덩크는 단순한 농구만화가 아니다. 청춘, 사랑, 우정, 스포츠맨십, 방황과 성장 등 인생이 담겼고, 우리들의 추억이 깃든 작품이다. 관객 모두가 그때만큼은 서로의 추억을 공유하는 듯했고, 영화관을 나서면서 마음 한편이 괜히 뭉클해졌다. 2023년 첫 영화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모두들 포기하지 말고 각자의 영광의 시대를 즐기시길.


TMI

*시작부터 가슴을 때리는 강렬한 오프닝 스케치가 은근 흥미롭다. 처음에 송태섭이 등장하고 차례로 정대만, 채치수, 서태웅, 강백호가 등장한다. 이는 영화의 전개 순서와 관련이 있다. 영화는 태섭의 이야기를 필두로 하여 대만, 치수, 태웅, 백호 순서대로 각자의 한계에 도전하며 그것을 극복해 내는 전개방식을 택한다.


★:4.5/5


Copyright 2022. 인턴작가 All rights reserve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