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로선 Jun 10. 2024

주인집 첫째 딸의 사생활

1994 여름의 어느 날에



콘크리트 전봇대에 달라붙은 참매미가 악을 쓰며 짝을 찾는다. 온도계의 수은주는 아침부터 삼십 도를 넘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연일 폭염 주의보를 발령했고, 일층에 세 들어 있는 노가다 박 씨 형님은 덥다는 핑계로  며칠씩 일을 나가지 않아 부부 싸움을 하고 있었다. 기억 상실증에 걸린 옥상 화실, 나의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도 넓은 손바닥을 늘어뜨린 채 주근깨 얼굴을 숙이고 있다.



악연 


불면의 새벽 2시, 이제는 습관이 돼버린 새벽 외출을 한다. 골목 끝에서 휘적거리는 낯설지 않은 실루엣 주인집 첫째 딸이 거나하게 취해서 퇴근을 한다.


이사 오던 날부터 주인 행세하는 첫째 딸과 욕지거리를 하며 싸운 것을 시작으로, 내가 키우던 바퀴벌레를 때려죽인 만행까지, 주인집 첫째 딸과 나는 전생에 톰과 제리였을 것이다. 누가 고양인지 쥐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직까지는 첫째 딸이 고양이 인건 확실하다. 멀리서 저 여자가 보이기라도 하면 내가 피해야 하니까. 나이는 나보다 열 살 위, 티켓다방 포주, 사람들은 김 마담이라 부른다. 안 싸운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싸운 사람은 없다는 이 골목 공공의 적.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채 고개를 숙이고 지나간다. 모른척해 주길 기대하면서.

"야 옥상!"

젠장 들켰다.

"한집에 살면 아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아냐. 쥐뿔도 없는 새끼가 그림만 그리면 다야?"

'쥐뿔도 없는 새끼' 맞는 말이라 딱히 반박할 수가 없다.

"안녕하십니까 이제 퇴근하세요?"

심드렁하게 인사를 다.

"그래 새벽에 퇴근한다. 씨발 뭘 봐 새꺄 너도 만져보고 싶냐? 용기도 없는 새끼가."

더워서인지 가슴까지 단추를 풀어버린 블라우스 안에서 하얀 젖가슴이 민망하게 흔들렸다.

"용기 없는 게 아니라 만지고 싶지 않은 겁니다. 제가 면역력이 약해서 손때 묻은 물건을 만지면 두드러기가 나거든요."

홧김에 말해놓고 도망갈까 잠시 갈등했다.

"뭐라구 이 새끼가 장난하냐?"

김 마담이 멱살을 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땀에 절은 값싼 술 냄새에 현기증이 났다.

새벽 골목이 시끄러웠다. 열대야에 뒤척이며 선잠 자던 골목이 깨어나고 있었다.

체면을 가장 큰 덕목으로 아는 주인집 아저씨가 달려 나와 동네 창피하다며 김 마담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들어갔다. 아버지에게 연행되면서도 협박을 한다.

"씨발 누구든지 뒷구멍에서 내 얘기하는 것들은 다 뒈질 줄 알아."



그대에게 띄우 새벽의 편지


옥상으로 올라가는 이층 철 계단 옆, 열어놓은 창가에서 김 마담의 넋두리를 듣는다.

혼한 남편과 양육권 소송을 하려는데, 잘 나가는 변호사 수임료가 꽤나 비싼 가보다. 재판에서 이긴다 해도 아이들과 살기 위해서는 정말 개같이 벌어도 모자랄 판이라, 같잖은 동포들의 손가락질과  돌팔매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만,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가끔 보는 아이들이 점점 엄마를 낯설어한다는 것이다. 갑자기 울면서 아이들 욕을 하다가 헛구역질을 한다. 뚱뚱한 주인집 아줌마가 어린 딸들이 보고 싶다고 떼쓰는 나이 먹은 딸을 다독이며 같이 울고 있다.


 까치발로 계단을 올라와 마태복음 5장 1절에서 12절까지 인쇄된 성문교회 주보로 종이비행기를 정성스레 접었다. 옥상에서도 제일 높은 화실 지붕으로 기어 올라갔다. 지금도 울고 있을 이층의 김 마담 창가로 무사히 착륙하길 바라며 종이비행기를 힘껏 날렸다. 처음으로 저 여자의 편이 되어주고 싶다는 의미 없는 마음을 담아서.


온몸이 땀에 젖어 악몽에서 깼다.

악몽은 현실에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골목길에 응급차가 필요이상으로 싸이렌을 울리며 존재를 알린다. 김 마담이 아침까지 술을 마시고  손목을 그었다고 한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는 응급차 백미러에서 핏빛 태양이 뜨겁게 반사되고 있었다.


병원으로 실려간 김 마담의 생사가 궁금했지만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았다. 오늘 새벽 내가 보낸 위로의 편지를 읽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새벽의 가을공원

 

여름이 던져놓았던 불타는 그물을 거두고 그 자리에 갈색 서러움 한 조각 남겨두었다.

사랑하는 이가 옆에 있어도 슬픈 절망의 계절, 가슴속에서 끝내 지울 수 없었던 이름도 가 되는 가을밤, 나는 또 견디지 못하고 새벽  골목길을 걷는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엔 별 하나 없다. 비가 올 거라는 것을 예감했지만 우산은 챙기지 않았다.

"어이 옥상!"

새벽에 퇴근하는 김 마담이다.

"안녕하세요."

술을 마시지 않은 그녀의 얼굴 독기가 없다.

"오늘도 새벽에 만나네, 우리 요 앞 공원에서 술 한잔할까?"

손에는 소주 두 병이 들려있다.

새벽의 가을공원에는 계절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벤치에 쌓인 은행잎을 치우고 앉아 술잔도, 안주도 없는 술을 마셨다.

"그림은 잘 돼가?"

김 마담이 왼쪽 손목에 손수건을 고쳐 묶으며 묻는다.

"뭐 그럭저럭... 여자 장사는 잘 되시나요?"

소주병 주둥이에서 입을 떼고 나도 안부를 물었다.

"씨발 말을 해도 여자 장사가 뭐냐."

김 마담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피식 웃는다.

"이 짓도 못 해 먹겠다. 아가씨들 선불땡겨서 도망가지, 단속에 걸려 영업정지에 벌금 내지, 양아치세금에... 엄마가 돼서 애들 보기도 부끄럽고."

담뱃불이 사르비아 처럼 빨갛게 피어난다.

"지난번 자살에 실패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실패를 축하하다니... 고마워 축하해 줘서."

담배연기와 한숨 한 모금을 길게 뱉어낸다.


텅 빈 공원에 습기 찬 바람이 불었다. 검은 비닐봉지가 박쥐처럼 날아다닌다. 더러는 유기견에게 쫓기는 길고양이의 날카로운 비명에 은행나무 하나가 몸서리치며 마지막 잎을 털어낸다.

공원의 외등 불빛 속으로 비가 내린다.

화실을 나올 때부터 비가 올 거라는 것을 예감했지만 우산 안 가져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술병의 술이 한 방울도 남지 않을 때까지 우리는 새벽에 내리는 가을비를 앉아서 맞았다.

그러고선 흔들리는 골목길을 말없이 걷다가 젖은 눈이 마주치자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고 그녀와 나의 야윈 어깨 위로 결핍과 열등감이 번갈아 흘러내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201호 소설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