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싸우면서 큰 다지만 유년 시절 나는 주먹다짐을 해본 적이 별로 없다. 싸워서는 안 된다는 교훈 때문이 아니라 싸우려 하기에 나는 겁 많고 소심한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싸움을 걸어올 때면 피하거나 일방적으로 맞기 일쑤였다. 청소년기에는 주먹다짐 같은 싸움은 다들 어린애들이나 하는 것쯤으로 생각해서인지 싸우려는 친구는 없었고, 커서는 더더욱 어른답지 못한 행실이라 여겨 치고받는 싸움을 할 의사를 내비치는 사람은 볼 수 없었다.
그럼 어렸을 적 지녔던 투쟁적 기질은 성인이 되어서는 무용하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 여겨 사장해야 할 기질이었던 것일까?
싸우기를 피하려 했던 아이든, 그렇지 않았던 아이든, 다 자라고 난 다음에는 그에게 남아 있는 투쟁성의 여부가 그가 살아갈 삶을 마주하는 태도에 크게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삭여야 할 몹쓸 기질인 줄로 알았던 그 잠적한 투쟁성이 성인이 된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침탈하고 정복하고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 국가가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정당하고 합법적인 폭력의 형태인 군대를 갖는 것처럼, 개인에게도 부당함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투쟁성의 잠재를 인정하는 것을 그릇되다고만 할 수 없다. 일상의 크고 작은 부당함과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해 위축된 자아를 안은 채 보내야 했던 시절을 기억할 것이다.
또한 호전성이나 투쟁성의 잠재는 표면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난 가끔 내가 일제 강점기를 살았더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본다. 결코 친일파를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나였다면 친일을 거부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 평화로울 때가 아니라 자신의 단호한 신념을 훼방하고 억압하는 환란의 때에도 얼마든지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다짐하고 실행할 수 있을까?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 등장하는 인물인 「기쿠치로」는 매우 연약한 인물이다. 그는 평화로울 때 태어났더라면 자신도 신에게서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며 살 텐데 환란과 핍박의 때를 살고 있는 연약한 자신에게 강자의 모습을 요구하냐며 신에게 한탄한다.
성경 속 역사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생명을 일치시킨 위인들이 그러하듯 과연 우리는 자신의 단호한 신념과 의지를 투쟁심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결연함만으로 지킬 수 있을까?
아이들을 대할 때 마냥 복종적인(나는 일부러 순종이란 말을 쓰지 않고 복종이란 말을 썼다.) 아이,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로만 가르치려는 실수를 한 건 아닌지 반성해 본다. 분명히 착한 아이가 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착한 아이는 그저 어른들이 다루기 쉬운 아이일 뿐이다.
아이를 보면서 그의 인생 전체를 들여다본다. 육체의 면역이 당연하듯이 그가 그 자신과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있는 힘과 건강한 정신을 지닌 자로 자라나길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