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맞이하는 것이 두렵다. 그냥 힘겨운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두렵기까지 하다. ‘끔찍한 하루를 어떻게 견디지?’ 하는 생각에 그 전날부터 잠을 설치기 일쑤다.
대략 아침 7시 반부터 시작되는 작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른 아침 6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에 집을 나서야 한다. 김해에서 창녕에 있는 일터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엄습하는 부담과 초조함을 안고 탈의실로 직행한다. 급히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오늘의 작업 준비를 서두른다. 오늘은 특히 작업량이 많아 발골 인원들이 지육실에 들어온 육중한 지육을 서둘러 작업실 안으로 밀어 넣는다. 평소보다 빨리 작업장 안으로 들어온 지육에 나는 괜히 마음이 더 초조해진다. 처음 소의 꼬리와 반골과 사골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뼈가 추려지고 고기의 부분들이 나뉘어 컨베이어를 통해 정형을 하는 작업자들에게 전달된다.
정형이 끝난 부분육들은 진공포장을 거쳐 이윽고 작업장 밖의 내가 일하는 작업공간으로 밀려 내려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 이외의 작업자들이 이미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한 지 꽤 시간이 지났고 나 역시 작업에 필요한 대부분의 준비를 마쳤음에도 나는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갈 수가 없다. 아직 등급판정서가 나오지 않아 이미 작업이 완료된 해당 지육의 일련 정보가 컴퓨터에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업장 안에서 작업 완료된 가공육이 더해질수록 초조함과 부담감도 커진다. 7시 반경에 시작된 작업은 거의 9시가 되어서야 컴퓨터에 지육의 일련 정보가 등록된다. 이제부터 나의 본격적인 작업의 시작이다. 잔뜩 밀려있는 해당 지육의 부분육들의 정보를 출력하여 부분육에 부착하고 정해진 조합에 따라 플라스틱 바스켓이나 종이 상자에 담아 출고팀에 인계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
나의 작업 상황을 고려하여 작업팀장이 많은 도움과 함께 작업속도를 고려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 상황 때문에 작업을 중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미친 듯이 서둘러 밀려있는 가공육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박수는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지고 호흡은 가빠진다. 겨우 보조를 맞추기는 했지만 안도할 수는 없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작업장을 돌아 작업 완료된 갈비 2짝(1짝당 40~50kg 이상 정도)을 포장해서 계량하고 해당 정보를 출력하여 부착한 다음 대차에 걸고 3~5개 정도의 상자에 발골 처리된 뼈를 담아 포장하고 계량해서 마찬가지로 해당 정보를 출력하여 부착한 다음 팔레트에 차곡차곡 쌓는다. 잦아들지 않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급하게 원래의 작업공간으로 돌아가면 물밀듯 내려온 가공육들이 잔뜩 쌓여있다. 허겁지겁 쌓인 가공육들을 거의 처리했다고 해서 한숨을 돌릴 수도 없다. 갈비짝과 뼈들을 처리하기 위해 다시 작업장을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갈비짝과 뼈들을 처리하고 급히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면 포장된 가공육들이 잔뜩 쌓여있다.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현기증이 일고 손이나 다리가 저리듯 얼굴이 저려온다. 일을 하면서 이런 경우는 왕왕 있다. 이러다 정말 쓰러지지나 않을까? 하는 약간의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이러기를 하루 종일 반복해야 한다. 작업량이 많아 잔업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면 중년을 훌쩍 넘긴 나로서는 이만저만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거기다 거래처에 따라 작업의 변수가 생기면 별도의 시간적 여유도 주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변수에 대응하느라 스트레스는 더욱 커진다. 그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이라고는 식사 시간인데 느긋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식사할 수가 없다. 체할 듯이 급하게 밥을 먹고 나면 서둘러 아직 처리되지 못한 작업을 완료해야 하기 때문이다.
2000년 1월 지인의 소개로 처음 육가공 업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처음 그곳에 들어갔을 때는 정직원이었지만 1년이 지난 후에는 2년마다 재계약을 해야 하는 하도급직으로 바뀌었다. 거기서 13년 가까이 일하는 동안에도 임금은 거의 고착 상태였지만 하던 일의 관성 때문인지 다른 일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그런 상황에서도 나의 미래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리석게도 안이했다. 그렇게 13년을 일하고 회한과 암묵의 상처를 안고 대책 없는 퇴사를 했다. 푼푼이 모아둔 얼마 되지 않는 자금으로 장사를 했지만, 시작한 지 1년도 채 안 되어 보란 듯이 말아먹었다. 지난 직장에서의 회한 때문에 육가공 업계에는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아 다른 직종에 이력서를 내봤지만 13년을 해오던 일을 계속할 것이지 왜 적지 않은 나이에 경험이 전혀 없는 일을 하려 하느냐?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반응이었다.
그 동네(육가공 업계를 말함)는 가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나를 받아줄 마땅한 곳도 없던 터라 건설 현장에서 잡부 일을 하게 되었다.
13년을 일했던 그곳을 나온 지 3년이 넘어 함께 일했던 동료 친구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함께 일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동네로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던 나는 메시지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친구의 이름으로 전화가 와도 전혀 받지를 않았다. 문자메시지나 SNS로 거듭 부탁의 메시지가 왔지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차라리 다른 사람을 구하면 될 것을 집요하게 나만 찾았다. 내게서 아무런 응답도 없자 본인도 일을 해야 하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날 찾으러 온다는 메시지가 왔다. 화들짝 놀란 나는 녀석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을 갔다. 이러기를 서너 번 정도 했던 것 같다. 대단한 녀석이다.
두 달이 넘게 지났을까? “이제는 체념했겠지.”라며 생각하고 있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사람이 그리웠던 나는 행여 수화기 저편에서 아리따운 여인의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전화를 덥석 받았다. 근데, “아뿔싸!” 받지 말았어야 할 전화를 받고 만 것이었다. 녀석이었다. 내가 하도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함께 일하는 동료의 전화기를 빌려 내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꼼짝없이 잡혀 다시 그 동네로 들어가게 된 나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한 침통한 표정으로 친구와 함께 그 동네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내가 다시금 그곳에 발을 들이게 되는 조건으로 친구에게 제안한 것이 있었다. 소의 뼈를 추려내고 부위를 나누는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지만, 친구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그렇다고 싸늘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때 내 나이는 이미 마흔 후반에 접어들었고 나이가 문제 될 것은 없다지만 설령 기술을 배운다고 해도 육가공 업계에서 그 나이에서의 나의 시장가치는 이제 막 배운 기술로서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인지 나의 의사를 만류했다. 당시 그 친구의 판단을 시비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또, 여건이 어떻든 내가 배울 의지가 있다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었을 것인데 나의 의지가 태만했다고 나무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옹졸한 변명을 하자면 나의 성격 탓인지 내가 하는 일의 특성 때문인지 쉬는 시간에 짬을 내어 기술을 배울 만한 시간적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친구에게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청한 것은 안정적인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을 원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내가 하는 일로써 나를 단적으로 말해 줄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만성적 아쉬움이 남아있었고, 무엇보다 나의 일에서 내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담이 신에게서 단절되기 이전에 그가 하던 일이 부럽다. 그 일이 관조적이거나 여가와 구분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은 아니다. 물론 천국에서의 노동은 여가와의 경계가 지극히 모호하다.
내가 아담을 부러워하는 것은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자신을 투영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노동의 결과에서 자기 반영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일은 그런 즐거움을 누리기 어렵다. 그건 사치에 가깝다.
노동에서 우리는 소외된 지 오래다.
노동에서의 우리는 (경제적 의미에서의) 생산을 위한 수단이자 도구로 변모했다.
때때로보다는 자주, 우리는 생산 속도에 맞추기 위해 거기에 자신을 구겨 넣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건 과도한 비약적 전개일까?
우리의 일상은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동과 잠깐의 휴식의 연속이다. 노동에서의 우리(참된 인간으로서의)는 호모 사케르가 되었고 회복으로서의 휴식은 충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회복은 참된 자기 회귀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렇듯 참된 자기에게서 유리된 채 표류하는 인생의 운명은 얼마나 애달픈가?
어렴풋한 희망이지만 이제야 나는 내가 할 일을 찾았다. 아니 그보다는 나답다고 생각하는 일, 나와 나의 일이 유리되지 않은 일을 찾았다. 그렇다고 전혀 불안하지 않거나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기대한 대로의 결과가 나오지 않아 낙담하고 좌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패할지도 모를 결과에 대한 온갖 잡념 때문에 시도도 하기 전에 무위가 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글쓰기는 그 시작이고 돌파구다.
글은 이제 나의 삶에서 당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