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까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꽃.
그 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
있다고?
그래 있다. 의외로 주변에 생각보다 많을 거다. 나도 그 중 한명이다.
그래?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 꽃가루 때문이다. 꽃가루에 의한 염증. 꽃가루 알레르기다. 나는 꽃가루 알러지가 심한 편이다. 멈출 수 없는 재채기 진동이 뇌에 전달 돼 두통도 일으킨다. 결국 신이 인류에게 내린 약이라 불리우는 스테로이드 처방 없이는 자연 치료가 힘들다. 더 힘든 건 이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재채기도 맘놓고 못한다는 거다.
그런 나에게 배우자가 집에 꽃을 갔다 놓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나를 싫어한다는 걸까? 꽃보다 남편은 될 수 없다는 뜻?
예전의 나였다면 어떻게 그렇게 남편에 대한 배려가 없느냐며 부부싸움을 선포했을 것이다. 다만 결혼생활 10년차가 되어가는 마당에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상 보단 그 너머를 보게 된다(실은 아이 셋을 키우는 육아의 삶 속에 서로간 다툼도 사치다).
와이프가 집 안에 꽃을 갖다 놓는 이유는 꽃이 주는 매력이 때문이다. 실제 올해 초 이사 후 집들이를 몇 번 했었는데 그때마다 와이프는 집에 꽃 한송이를 갖다 놨었다.
사진만으로도 꽃 한묶음으로 집 안 분위기가 한층 아름답게 바뀌었는데 나도 놀랄 정도였다(또한 나중에 안 사실인데 집에 있던 꽃들은 꽃가루가 많이 날리지 않는 종이었다).
꽃가루도 날리지 않는 아름다운 꽃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내가 꽃을 싫어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꽃이 시들어 간다는 것.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인다'는 말이 있지만 뿌리 없이 아름다운 시간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건 엄연하다. 40대인 내가 다시 20대 젊은 시절로 되돌아 갈 수 없듯이.
아내는 꽃이 시들기 전 사람에게 아름다움이란 선물을 주고 떠나니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의미있냐고 되묻는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게 꽃 뿐만이 아니라는 거다. 모든 게 그렇다. 모든 건 결국 사라진다. 사람도 그렇다. 절대권력의 왕도, 힘없고 가난한 사람도 결국엔 모두 죽는다. 그래서 살아 생전 이어령 선생님은 죽음 앞에는 모든 게 공평하다며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말씀하셨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제 맞닥뜨리는 문제가 생긴다. 인생의 덧없음. 바로 허무다.
어떻게 살아가도 결국 죽음을 맞는다는 건 굳이 착하고 열심히 살아야 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 반대 논리인 "어차피 한번뿐인 인생 열심히 살아가지 뭐"보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 해야하는 명제는 '사후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죽음 이후 최후의 심판 같은 관념이 없다면 현세에서 열심히 살 이유가 없는 거다.
그럼 이 글의 결론은 무엇일까? 현실에 좌절한 염세주의?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는 허무주의?
흔히 진리는 하나라고 하지만, 이 상황에서는 각자 길을 찾아야 한다. 단테, 괴테, 헤르만 헤세,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같은 대문호는 결국 삶의 의미를 찾는 여정을 지향했다. 그것이 눈앞의 쾌락을 넘어 진정한 자유의 가치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말은 쉽지만 도대체 내 삶의 의미는 어떻게 찾을까? 정답은 없다. 우리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인격체다. 살아온 환경이나 경험이 다르다.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다만 공통적인 키워드가 있다.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바로 아모르 파티(Amor Fati)다.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고난을 나의 길을 가게될 것이다. 그렇게 삶의 의미를 찾으면 시들어가는 꽃도, 다 타버린 연탄재도 후회없는 선택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