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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모아 에디트 Jun 25. 2023

과거를 번역해 미래를 조각하는 예술가들

신미경, 이수경

2016년 문학작품 『채식주의자』가 한국 소설로서는 최초로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에서 수상했다. 작가인 한강 외에 소설을 영문으로 옮긴 영국인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 또한 공동 수상이라는 영광을 얻었다. 이후 문화가 다른 두 사람의 글쓰기 방식에 대해 한동안 논란이 일었다. 데보라가 완벽하게 소화해 낸 번역 덕분에 한강의 소설이 세계적으로 퍼져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평이 있는가 하면, 한국인 특유의 담담한 정서를 담아 서술한 한강의 문체를 화려한 미사여구와 부차적인 설명으로 점칠 한 오역투성이의 번역이라는 비판 또한 끊이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화자가 의도한 글의 목적이 잘 전달되었는가에 있겠지만, 이렇듯 동양과 서양의 전혀 다른 두 문화권의 작품을 번역할 때 언어적인 문제와 문화적 차이 등을 감안해도 ‘완벽한 해석'이 나오는 것은 애초에 불가한 일이다. 여기서 하나의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번역의 과정에서 원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새로운 요소들이 더해진다면 이렇게 재창조된 결과물은 그럼 하나의 다른 작품으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이를 역으로 활용해 새로운 장르의 예술로 승화시킨 두 명의 여성 작가가 있다. 








신미경은 특정 문화를 대표하는 역사적 유물과 예술품을 비누로 재현하는 작업을 펼친다. 서울과 런던을 오가며 경험한 종교와 역사, 문화적 문맥을 ‘번역’하여 기존의 전통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성을 입혀 유지하고 재해석하는 것에 초점을 두며 작품의 절대적 가치에 대해 질문한다.  


그녀는 과거 인터뷰에서 “1998년 서울대학교에서 조각으로 석사를 마치고 런던으로 넘어가 작업을 하던 당시에는 개념미술이 우세할 때라 과거의 미술이 터부시 되곤 했다. 고전 조각도 언젠가는 동시대성을 가졌었을 테고, 그 당시에는 의미가 있었던 것인데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그 의미가 사라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며 오랜 시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고 말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선택한 소재가 바로 비누였다. 왁스나 비누처럼 단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쉽게 녹아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것들의 역설적인 상황은 오래된 질문의 답을 시각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L) Translation - Aphodite of Knidos by Praxiteles(330BC), 2002 (Restored in 2013), Soap, Stainless Steel, Varnish © Meekyoung Shin

(R) Working in progress at British Museum, 2004 © Meekyoung Shin



1996년도부터 박물관의 유물을 비누로 복제하는 <트랜스레이션(Translation)> 시리즈는 “작품 자체가 자신의 존재와 삶을 반영하는 지속적인 번역의 산물”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그리스 시대의 대리석상을 말 그대로 ‘복제’하는 이 작업은 시간이 지나며 마모되고 변형된 석상의 현재 모습 그대로를 비누로 깎아내면서도 원본과 복제 사이에 의도적인 거리감을 하나씩 남긴다. 복제품에 특유의 비누 향을 그대로 담거나 원작 옆에서 공개적으로 작업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작가 자신의 내러티브로 유도한다. 이후 작업에서는 원본에 이질적인 현대요소를 대입한 일종의 ‘패러디'를 시도한다. 헬레니즘 시기의 조각가 프락시텔레스의 작품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의 신체에 자신의 얼굴을 삽입하고 <웅크린 비너스>와 똑같은 포즈를 취한 비누 조각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을 위해 미술사 서적에 실린 도판을 참고하였는데 도판의 원작들은 이미 소실되었고, 작가는 이렇게 재탄생한 자신의 작품이 새로운 작품으로서의 원본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완벽한 ‘오역’이다. <트랜스레이션>연작은 유럽의 대리석상뿐만 아니라 중국 도자기 등 동서 문명을 대표하는 고대 유물들을 다양한 모습의 비누로 변모시켜 원본과 복제 사이의 의미와 가치가 변화하는 과정을 선보인다. 


Translation-Vase Series, 2006-, Soap, Pigment, Varnish, Mirrored Stainless Steel Plates, Wooden Crates © Meekyoung Shin



이처럼 그녀는 <트랜스레이션>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다른 문화 간의 경계를 끊임없이 이탈과 개입하며 자신의 존재 방식을 번역이라는 언어로 설명한다. 다만, 정확한 뜻을 전달하는 ‘번역’이 아닌 ‘오역'에서 비롯된 어긋남에 주목한다. 이런 과정을 작가 스스로 즐기며 후기 식민주의적 관점의 ‘문화 번역' 개념에 빗대어 제시한다. 동서양 고금의 문화가 다른 문화권에 선보여질 때, 그 낯선 경험들이 새로운 방식의 해석을 자아냄으로써 또 다른 가치를 이어나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를 옮기는 ‘번역’의 세계에 정답은 없어 보인다. 








이수경은 조각난 도자기들의 파편을 모아 금박을 입혀 이어붙이고 생명을 불어넣어 새로운 형태로 소생시키는 <번역된 도자기(Translated Vase)> 시리즈를 선보여왔다. 무질서하고 완벽함과는 거리가 먼 상황을 일련의 현상과 일상에 편재한 메타포를 해석해나가며 의식의 흐름에 투영된 자신과 새로운 영역을 끊임없이 고찰한다. 


이수경의 <번역된 도자기>는 2001년 이탈리아의 알비솔바(Albisola)에 위치한 도자기 공방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한국의 도자기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이탈리아인 도예가 안나 마리아에게 김상옥 시인이 조선 백자를 칭송하며 쓴 시를 번역하여 낭독해주었고, 떠오르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조선 백자 양식의 도자기 12개의 제작을 요청한다. 단지 언어로만 전달된 18세기 조선 시대 양식의 백자가 12개로 번역되었다. 도자기를 글로 옮긴 뒤 다시 다른 문화의 언어로 번역하고 종국에는 다시 실체를 가진 도자기로 재현되는, 물질화와 비물질화가 반복되는 과정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결과로 만들어진 도자기의 아름다움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다른 두 문화가 일시적으로 충돌하는 것에 집중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한편 이 프로젝트는 이수경 본인에게도 한국의 전통 미술에 대한 깊은 관심을 일깨워주었고, 자신이 속한 문화의 미학적 전통을 되새기는 일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해주었다. 

12 vases,2001,Ceramic, silk, flower, Courtesy of the artist, © Yeesookyung



전통 미학을 계승하면서 자신의 작품에 접목하는 작업은 우연히 들린 이천의 도자기 공방의 가마 옆에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는 깨진 도자기 파편을 보고 일순 마음이 일렁이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본래는 목적을 가지고 빚어진 도자기였으나 가마에서 나온 도자기의 운명은 한순간에 전복되었다. 여기서 그녀는 ‘완벽한 타자’의 모습을 보았다고 말한다. 도공의 손에서 목적을 가지고 탄생되었던 도자기도 한때는 도공의 자아가 반영되어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공이 스스로 파괴시켜 버린 순간 도자기는 자아를 잃고 산산이 조각난다. 이수경은 이렇게 죽은 도자기의 파편들을 모아 전통적인 도자기 복원술을 차용해 퍼즐을 맞추든 이어붙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재해석된 도자기들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흙바닥에 버려진 존재들이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아 아홉 마리의 용이 되기도 하고 고대의 보물처럼 빛을 내며 질긴 생명력을 위시하며 아우성친다. 



(L) Translated Vase, 2009, Ceramic shards, epoxy, 24k gold leaf, Collection of Spencer Museum of Art, Lawrence, USA © Yeesookyung

(R) Translated Vase, 2009, Ceramic shards, epoxy, 24k gold leaf, Courtesy of Ota Fine Arts, Tokyo, Japan © Ota Fine Arts



이수경이 행한 또 다른 방식의 번역은 전혀 다른 결과물을 빚어냈지만 주목해야 하는 것은 번역의 과정이다. 도자기가 부서진 순간부터 작품에 개입한 모든 과정은 오로지 자신의 경험과 오직 몸의 언어로만 해석한 직감적이고 육체적인 번역이다. 재해석에 가까운 ‘번역'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도공이 장인 정신으로 빚어낸 도자기 표면의 아름다운 결과 유려한 곡선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숨 쉬고있다. 











 © 아모아 에디트, 2023 (원문 : https://amoaedit.com/review/?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4382375&t=board)






Reference. 

임근혜, 신미경의 <트랜스레이션>에 관하여 (2013)

신미경, 올해의 작가상 2013 인터뷰, 국립현대미술관 (2013. 5. 28)

신미경, 번역의 개념, <트랜스레이션>, 국제갤러리 (2010)

원지은, 신미경 - 향기를 품은 조각, 메종  (2022. 4. 1)

데이빗 엘리엇, 한국 도자기를 생각하다 - 이수경 작품 세계에 대한 명상 (2012)

이수경, 작가인터뷰, 더페이지갤러리 (202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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