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는 어딜 가더라도 다 좋다. 하늘이 내린 자연. 그 자연만으로도 한 해 수십만 명의 여행객들이 스위스를 찾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중에서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나한테 물으면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체르마트 마터호른'을 꼽을 것 같다.
마터호른, 체르마트를 알게 된 건 회사 선배 L 덕분이었다.
아주 예전 회사 선배 L(지금은 안타깝게도 타계하셨다)께서 "사람들이 스위스는 융프라우, 인터라켄 좋다들 하는데, 난 체르마트가 제일 편안하고 좋더라"라고 한 기억이 체르마트, 마터호른을 인지하게 된 시작이었고, 그 후로 나의 여행 버킷리스트에 넣어뒀다.
당일로 그린델발트에서 마터호른을 다녀오느라 체르마트의 편안함과 황금 호른을 볼 기회는 다음으로 미뤄야 했지만 마터호른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될 정도로 소위 '가 볼 만한 곳'이다.
유럽에 살면서 내가 직접 찍은 사진 중에 스스로 평가하기에 최고의 사진이 마터호른과 그 반영이다.
그래서 지금도 핸드폰 잠금 화면에 저장해 두고 매일 같이 본다.
그럼에도 지겹기는커녕 매번 그 장엄함에 놀라곤 한다.
KBS 주말의 영화에서 본 마터호른
어릴 때 외국 명화를 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둘 있었다. 하나는 주말의 영화, 다른 하나는 일요명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어릴 때 기억에 일요명작은 너무 재미없는 고전영화였고, 나름 토요명화가 재미있는 영화를 많이 방영해 줬었다.
그런데 영화 시작 전에 웬 산에 별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것을 본 기억이 있는데, 그것이 마터호른을 가려고 공부하다 보니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상징이었고, 그 영화사 상징이 바로 동틀 녘? 아니면 해거름의 파테호른이었다.
그런 마터호른으로 나는 간다. 어릴 때 영화의 기억과 지인 L이 던진 단초를 따라서.
그린델발트에서 체르마트까지는 기차를 슈피츠(Spitz)에서 한번 갈아타고 가면 약 3시간 걸린다. 그래서 아침 이른 시간에 일어나 부지런히 서둘러야 당일로 다녀올 수 있다.
여기서 Tip.
스위스도 기차는 출발 시간에 가까워질수록 가격이 올라간다.
스위스 날씨가 변덕스러워 마터호른을 영접하러 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표를 막판까지 예매를 안 했더니 이틀 전보다 하루 전 가격이 무려 30프랑 더 내야 했던 기억이 있다.
스위스 기차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여행을 하루라도 미리 계획하고 예약할수록 저렴한 듯하다. 물론 그만큼 여행 못 갈 리스크에도 노출이 많이 되지만 말이다.
그린델발트의 '시원한 우유 같은 신선함'이 밴 샬렛 창에서의 풍경이다. 멀리 새벽녘의 아이거 북벽이 위용을 드러낸다.
아침을 먹고 나니 해가 떠서 그런지 화면 색감이 밝아졌다.
내가 머물렀던 샬렛. 아마 앨리스 할머니의 며느리(?) 마가렛 할머니가 운영한다고 하는 샬렛이다. 엄청 친절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직접 예약전화는 받지 않고 메일로만 소통하신다. 아무래도 언어 문제가 아닐 듯싶다.
그린델발트 터미널역으로 걸어가는 길.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어둑어둑하다.
그린델발트 = 아이거 북벽.
그래서인지 그린델발트 사진은 대개 아이거 북벽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래야 사진이 사진답다.
그렇게 3시간 여를 기차로 달려 체르마트에 도착.
체르마트는 차로 갈 수 없는 마을이다. 차로 가는 분들은 체르마트 직전 역에서 차를 주차해 두고 기차로 가야 한다고 한다.
하늘이 쨍하게 파란 체르마트. 첫인상도 강렬하다. 오래된 나무색, 갓 수리한 밝은 나무색, 파란 하늘의 색감이 조화롭다.
체르마트역에서 산악열차를 타고 고르너그라트로 오른다.
체르마트역 앞에 고르너그라트 반(Gornergrat Bahn)이라는 이름의 역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체르마트에서 고르너그라트행은 7.24분이 첫차, 마지막으로 고르너그라트에서 내려오는 기차는 저녁 8시 7분이다. 가격은 시기에 따라 다른데, 92~132 스위스프랑 정도다.
처음에 가격 보면 이렇게 비싸냐 하는 생각이 들지만 정작 올라가다 보면 그 가격은 돼야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산악열차를 만들 때의 난이도는 엄청난 듯하다.
고르너그라트 열차는 오른쪽에 앉는 것이 좋다. 당연히 올라가는 동안 마터호른이 너무 잘 보이기 때문이다.
최근 지인 K 가족이 스위스 패키지 투어를 갔다. 출발 전에 일정을 쭉 보니 아주 알찬 일정이라 패키지에 대한 생각 자체가 좀 바뀌긴 했다. 여전히 난 자유여행을 선호하는 사람이긴 하다.
지인 K에게 여행 잘하고 있냐는 안부 문자를 보냈더니 마침 마터호른에 가는 길이라 한다.
그 지인께서 보내준 마터호른은 또 다른 느낌이다. 구름 위로 우뚝 속은 마터호른은 인간의 속세와 떨어진 천상의 세계 같은 느낌이다. 그 아래 체르마트 마을은 옹기종기 오순도순 평화로운 마을의 느낌이다.
그렇게 30분 정도 열차가 오르면 전망대에 다다른다. 고르너 그라트역 직전 로텐보덴역이다. 하이킹을 즐기려는 사람들인지 꽤나 사람들이 많이 내린다.
이제 나의 마지막 목적지 고르너그라트에 내린다.
내려서는 여행객들 모두 저마다의 마터호른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이때만큼은 국적도 불문이고 성별도 불문이다. 사진 찍느라 분주하다.
기차역에 내려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에 이런 잔망스러운 포토스폿도 만들어 뒀다. 사진 찍기에 나쁘지 않다. 사람들이 줄 서서 찍길래 나도 뒷사람에게 부탁해서 저 방패 모양의 포토스폿에서 기념사진을 한 장 남긴다.
전망대 아래쪽에 있는 성당이다.
또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면서 초를 밝힌다. 꼭 행복하고 꼭 돈을 대박 벌게 해 달라는 소원 말이다. 너무 세속적인가 싶지만 지금 생의 행복을 바라며 종교에 기대는 건 약간은 인간의 본성 아닐까 하면서 위로를 해 본다.
고르너그라트 빙하길이다. 마치 물이 마른 강처럼 빙하 길이 선명하다. 수십만 년을 저 길을 따라 눈이 쌓이고 녹고 했을 것이다. 자연의 경이로운 신비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선에서 기념 샷. 아이폰과 애플워치 조합이 만들어낸 셀카. 누군가 찍어준 듯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전망대 뒤쪽 언덕에서 본 마터호른. 전망대 뒤쪽에는 언덕이 하나 있는데, 빙하와 마터호른을 파노라마 배경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전망대 안을 살짝 구경해 본다.
해발 3100미터. 그 앞엔 4,478g이나 4.4킬로 무게의 마터호른 초콜릿산이 있다. 하나하나가 눈길을 끄는 마력이 있다.
고르너그라트에서 로텐보덴 하이킹
저 멀리 있는 마터호른을 오를 순 없지만 그래도 또 다른 관점에서의 마터호른에 대한 기억을 위해 하이킹을 선택했다. 미리 준비하기는 했으나 10월 중순의 하이킹은 장비 없이 좀 불편하긴 했다. 더구나 왼쪽 손목에 금이 간 상태로 간 여행이라 더 조심스럽긴 했다.
그러나 이 하이킹은 고르너그라트를 선택한 사람이라면 꼭 해 보길 추천한다. 마치 인터라켄에서 멘리헨-클라이네샤이덱 하이킹길처럼 Must-do 아이템이다.
스위스 여행 중에 이 길 하이킹이 제일 기억에 남고 좋았다.
지인 K의 일정에 이 하이킹이 있는 걸 보고는 일정이 알차다 생각했었다.
전망대 아래 저 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 하이킹의 시작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 위에 내 발자국을 내면서 가는 길은 늘 신난다. 마치 눈 내리는 날의 강아지처럼.
내려가다 보면 토블론 초콜릿 광고판?을 배경으로 마터호른을 찍을 수 있다. 토블론 초콜릿도 모양이 마터호른임을 여행 준비하면서 알게 됐다. 너무 심플해서 처음에는 산이라고 생각하기 어렵지만 초콜릿 케이스 등에 마터호른의 느낌이 물씬 배어있다.
내가 찍은,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전문가스러운 사진이다.
이 사진은 내 핸드폰 배경화면 사진으로 저장해 두고 몇 년을 보고 있다. 그래도 질리거나 하지 않는다.
호수에 비친 마터호른. 그 신령스러움이 주는 감흥은 지금도 너무 생생하다.
이 사진 하나를 찍기 위해 비엔나에서, 그린델발트에서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이 사진 한 장으로 스위스 여행을 다했다 해도 과함이 없다. 내가 찍은 명작이다.
아쉬워서 반영과 마터호른을 연신 찍어본다. 그래도 사진마다 무언가 조금씩 아쉽다.
이번에도 지인 K의 사진도 함께 포스팅해 본다. 여전히 그때의 느낌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원래는 고르너그라트에서 로텐보덴까지만 하이킹을 할 생각이었는데, 그대로 몇 정거장을 더 걸어 내려왔다. 사람이 거의 없는 길을 혼자서 걷는 느낌. 좋다, 아주.
아마 리펠알프까지 걸었나 보다. 약 3시간 정도?
저 멀리 하늘에서 패러글라이딩 하는 사람이 보였다. 마터호른과 패러글라이딩. 천상계에 다다르고픈 인간의 마음을 상징하는 바벨탑이 겹쳐진다. 패러글라이더는 그런 마음으로 나는 걸까 싶다.
그렇게 계속 걷고 걸었다. 하이킹에 매료되는 순간이 지금 아닐까 싶다.
그렇게 마터호른 당일치기를 끝내고 다시 인터라켄으로 돌아오니 이미 어둑어둑.
그래도 난 꿋꿋하게 호기심 천국 뚜벅이로 이젤발트로 간다. 현빈의 피아노 소리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