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스위스로의 짧은 3박 4일의 여행을 마무리하고 비엔나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다.
당초에는 스위스의 관문 취리히에서 루체른을 들렀다가 인터라켄으로 가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저가항공 일정의 특성상 취리히에 아침 7시쯤 도착하니 촌음을 아껴 인터라켄, 융프라우 요흐를 보러 가는 것이 나름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기왕 간 김에 하루 휴가를 더 내서 루체른 리기산을 가볼까도 했었으나, 이미 융프라우 요흐에 마터호른을 본 터라 굳이 리기산에 오르는 것은 내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치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 날 아침은 그린델발트에서 루체른으로 아침부터 부산하게 서두른다.
인터라켄에서 미처 하지 못한 슈니케 플라테 하이킹, 툰 호수 유람선, 하더 클룸에서 인터라켄, 융프라우 배경 석양 보기, ‘사랑의 불시착’ 배경지였던 시그리스빌(손예진이 스위스에서 자살하려 뛰어내리려다가 사진을 찍어달라는 현빈 커플을 만난 곳이다). 하고 싶은 것이 더 많았으나 다음을 기약하며 아침을 맞는다.
그린델발트에서 내가 묵었던 샬렛. 내가 묵었던 방에서 보이는 아이거 북벽이다. 매일 같이 눈 뜨면 보이는 풍경이 저렇다면 며칠 안가 식상하겠지만, 나에게 허락된 시간은 사흘. 그 사흘 내내 아침에 눈 뜨면 볼 수 있는 풍경이라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멋짐 뿜뿜이다.
집에서 잠깐 나와서 집 근처를 소요해 본다. 보는 풍경만큼이나 공기가 폐부에 와닿아 찬 기운이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그 마을 풍경은 평화롭다.
예전에는 헛간이나 농막으로 썼을 법한 별채인데, 지금은 여행객을 위한 공간인가 보다. 창문에 커튼도 달려 있으니 말이다. 아주 오래돼서인지 짙은 고동색 빛깔의 나무. 그 나무로 만들어진 오두막. 그 옛날부터 이어져 온 시간과 세월의 정취가 물씬 느껴진다.
내가 묵었던 마가렛 할머니 샬렛이다. 나름 꽤 큰 샬렛이다. 현대화된 호텔에서 묵는 것도 좋지만, 우리나라 민박 같은 샬렛에서 머무는 시간은 스위스를 느낄 수 있는 여러 루트 중 하나가 아닐까. 참고로 마가렛 할머니집도 구글지도에서 검색이 된다. 예약은 메일로 해야 한다.
그 이른 아침부터 한가로이 풀 뜯는 소. 그 소의 목에 달린 종. 익숙해졌을 법 하지만 움직일 때마다 종소리가 울리면 스트레스로 노이로제에 걸리지나 않을까. 소를 찾기 쉽게 하기 위한 도구라지만 다소 인간 편의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그린델발트 터미널역 근처 나무 조각이다. 알프스 호른을 부는 남자, 앞쪽 가슴부터 배까지 신발끈처럼 끈으로 조이게 되어 있는 스위스 전통의상을 입은 여자. 축제에 참가해서 무언가를 하려는 듯싶다. 알프스 호른을 부는 남자 조각을 보고 있으면 영화 장면에서 봤던 호른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환청은 아니지만.
스위스 국기를 흔들면서 웃고 있는 남자도 있다. 그런데 조금 더 잘생긴 얼굴로 조각해도 좋았을 법하다.
산악열차를 타고 그린델발트에서 다시 인터라켄 오스트 역으로 내려왔다. 여기서 SBB를 타고 루체른으로 가는 일정이다. 기차 시간이 남아 인터라켄 동역 근처를 거닐어 본다. 한 장면이라도 놓칠세라.
빙하 녹은 물이라 아주 짙은 에메랄드 빛이다. 아마 해가 없어 그럴 테지만, 해가 뜨면 아주 발고 영롱한 옥빛으로 빛날 호수일 거다.
이번엔 브리엔츠 호숫가로 간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바다 같은 호수다. 넓다.
그렇게 기차에 몸을 싣고 나의 스위스 여행 마지막 장소. 루체른으로 간다.
루체른에 도착하자마자 기차역에서 내 눈에 띈 건 스위스 기차 여행 코스다. 지도에는 주요 기착지가 있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기차가 우리나라 지하철 노선도처럼 그려져 있다.
여행 전 봤던 베르니나 익스프레스, 글래셔 익스프레스, 골든패스 익스프레스같은 코스들이 눈에 띈다.
솔직히 말하면 자연은 처음 30분은 놀라움에 ‘우와’하면서 풍광에 압도되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그 풍경이 그 풍경이라 우리 코의 후각처럼 금세 지쳐 그 감흥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군데군데 내려서 도시나 마을을 투어 하게 만들어 둔 것이겠지. 세 시간이 넘게 글래셔 익스프레스를 타고 움직이면 그 감흥은 금세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래도 장크트 갈렌, 생 모리츠, 몽트뢰, 루가노, 인터라켄 같은 단어를 보면 또다시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게 사실이기도 하다.
루체른역 나가서 오른쪽으로 호수 옆에 자리 잡은 루체른 미술관. 시간이 허락하면 무엇이 있는지 눈으로 확인해도 될 일이지만 나는 건너뛴다. 3시간 정도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기 때문이다.
큰 관광지에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시티투어 기차다. 증기기관차처럼 생기고 아주 작은 코끼리 열차 정도되는 크기다. 저 기차 타고 한번 도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으나 난 하이킹에 맛을 들인 터라 과감하게 걷는 것을 선택한다.
처음으로 간 루체른 여행포인트는 카펠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다리다. 나무로 지었다 보니 한번 불에 타서 복원했다고 한다.
1333년에 지어졌는데 그로부터 660년이 지난 1993년에 담배꽁초 때문에 화재가 나서 대부분 교체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안에는 불에 탄 흔적들이 곳곳에 있다.
다리를 쭉 걸어보면 천장 모서리에 그림들이 늘어져 있다. 역사적 사건들을 그려놓은 그림이라고 하는데 그 역사적 사건들을 모르니 나에겐 그냥 그림일 뿐이다. 이럴 땐 전문가이드가 옆에서 설명해 주면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24캐럿 골드가 들어간 술인 듯. 먹을 수나 있는 술일까?
걷다가 어느 성당에 들어갔다. 유럽에선 가는 곳마다 들어갈 수 있는 성당이라면 가급적 들어가 본다. 그리고는 누굴 위해 초를 켜고 기도를 한다. 난 기독교 신자도 가톨릭 신자도 아니지만 진심이 들어간 기도는 종교를 초월해서 절대자에게 닿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어느 건물 벽이다. 대천사 미카엘이 악마를 칼로 내리치려는 장면. 이젠 연상작용으로 미카엘 대천사상을 보면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의 몽생미셸이 생각나고,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이나 다른 유럽의 중세 미술들이 전시된 미술관이면 빠지지 않는 미카엘 대천사의 그림이 생각난다. 미카엘 대천사의 팬이 되었다.
이상하리만치 루체른에서는 벽 모서리에 붙은 조각상들이 눈에 많이 띈다. 마치 원기옥을 쏘기 위해 기를 모으기 위해 공중 부양하는 여성 전사 같다.
그렇게 목적지 없이 (사실상 목적지는 있다. 빈사의 사자상) 루체른 올드타운을 걷는다. 정해진 길도 없다. 그냥 방향만 빈사의 사자상을 향할 뿐.
가게 앞 벽에 붙은 장식물을 보면, 잘츠부르크의 게트라이데 거리가 같이 떠오른다. 왠지 프레젤을 닮은 모양을 보니 먹거리 관련 가게인가 보다 싶으면 아래에 레스토랑이라도 적혀 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 더불어 사는 사회의 단면이 아닐까.
선물 가게 앞 피노키오. 빨간색과 피노키오가 선물 사려는 관광객들의 마음을 끈다.
빈사의 사자상 쪽으로 가기 전에 올드타운 뒤에 성에 올라본다. 이름은 무제크 성벽.
시계탑이 유명하고 루체른 전경을 볼 수 있다 해서 올랐다. 크게 볼 것은 없으나 혼자 하는 루체른 시내투어니 걸어본다. 가기 싫으면 그냥 올드타운 가게에서 커피 한잔, 맥주 한잔 하는 것이 더 기억에 남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호기심 천국인 나는 기꺼이 성을 오른다.
금도금된 시계추인가 보다.
그리고 그 옛날 시계의 내부를 볼 수 있게 전시되어 있다. 나름 재미있다.
간단하게 성 투어를 마치고 이제는 루체른의 아이콘, 빈사의 사자상으로 간다.
몸에 맞은 창의 조각, 정말 곧 숨이 멎을 듯한 상황에서 힘겨워하는 사자의 표정이 그대로 살아 있다. 있다.
베르텔 토르발센이라는 작가가 조각한 것으로 1792년 프랑스혁명 당시 무장한 군중이 파리의 튈르리 궁전을 습격했을 때 학살된 수백 명의 스위스 근위병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라 한다.
당시에는 스위스는 근위병을 여러 나라로 보냈나 보다. 이탈리아, 아니 정확하게는 바티칸 시국에서 교황을 지키는 근위병들은 스위스 출신들만 채용한다고 하니 말이다.
안내판에 쓰여 있는 내용을 읽다 보면 저절로 숙연해지고 마음이 착잡해진다. 그 스위스 근위병들이 겪었을 아픔과 고통을 생각하면 말이다.
빈사의 사자상을 지나 다시 호숫가로 내려오다 보면 만나는 쌍둥이 탑이 있는 성당이다.
다시 루체른 역 쪽으로 걸어와서 본 성당과 도시의 전경. 이렇게 짧은 루체른에서의 시티투어는 끝나고 비엔나로 돌아가기 위해 취리히 공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