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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레길 협동조합 Jul 01. 2022

우리 마을은 왜 학교가 많을까?

혜화·명륜 성곽마을의 궁금한 이야기

 혜화동에서 종로08번 마을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여러 학교들을 만날 수 있다. 혜화초등학교, 서울국제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를 차례로 지나다 보면 많은 학생들이 버스에 가득 찼다가 빠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학교들 외에도 혜화·명륜 성곽마을에는 수많은 학교들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안에 10곳가량의 학교가 자리하고 있으니 면적에 비해서 학교 수가 꽤 많다. 그렇다면 우리 마을에는 왜 이렇게 많은 학교들이 자리하고 있는 걸까?      


 그 답은 조선시대 성균관에서부터 시작된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후에 왕이 될 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하기도 했으니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관직에 나아가고 싶은 선비들은 누구나 과거 시험을 치러야 했다. 성균관은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유생들이 모여 공부를 하던 공간이었다. 성균관의 정원은 대략 200명이었다고 하며 학교에서 먹고 자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한다. 이때 200여 명의 유생들의 생활하는 성균관의 건물을 관리하고, 기숙사와 식당 일을 도맡아줄 이들이 반드시 필요했고, 이런 일들을 전담하는 이들을 반인(泮人)이라고 불렀다.     


 반인이라는 이름은 무엇을 의미할까? 조선시대에 성균관을 다른 말로 ‘반궁(泮宮)’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옛 지도를 보면 성균관의 양쪽으로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성균관을 둘러싼 연못이 반달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물을 반수(泮水)라고 불렀고 반수가 흐르는 성균관을 반궁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때문에 성균관과 관련된 명칭들에 ‘반(泮)’자가 붙게 되었다. 그래서 성균관 주위의 마을을 ‘반촌(泮村)’이라고 부르고 그곳에 살며 성균관의 잡역을 도맡은 사람들을 반인이라고 부른 것이다.      

반수가 흐르는 성균관의 모습(출처: 한양도(漢陽圖),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즉 혜화·명륜 성곽마을의 옛 이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반촌’은 성균관과의 관계 속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반인들은 성균관 안에서 유생들을 보조할 뿐만 아니라 성균관 밖의 반촌에서도 유생들과 끈끈하게 교류했다. 성균관의 기숙사나 식당이 수용인원을 넘어설 경우, 또는 지방에서 과거시험을 보러 온 경우 등에 유생들은 반촌에서 하숙이나 식사를 해결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성균관과 반촌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였다.   

  

근대 혜화·명륜 성곽마을의 학교(출처: 서울시, 『성곽마을 혜화·명륜권 생활문화기록』, 2016, p30)

 한편 조선 말기를 지나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며 성균관은 침체기를 겪지만 광복과 함께 극복하여 그 명맥을 이어나간다. 1910년 이후 성균관에서의 교육은 중지되고 명칭도 경학원(經學院)으로 바뀌었다. 이후 성균관은 명륜학원, 명륜전문학원 등으로의 변화를 거쳐 결국 1943년에 폐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광복 후 성균관은 명륜전문학교로 다시 개교하였고 이 학교가 이듬해 성균관대학으로 개명하면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성균관대학교의 모습이 되었다. 교육기관으로서 상징적인 존재인 성균관이 혜화동에서 꿋꿋하게 버텨낸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성균관이 격동을 겪는 동안 혜화동과 명륜동에는 다른 학교들도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혜화의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에 가보면 ‘보성옛터’라는 기념비가 남아있다. 이 기념비는 보성학교의 옛터 위에 세워졌으며 “3·1 운동의 선봉에 서서”라는 문구로 시작된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기미독립선언서가 인쇄된 곳이 바로 보성학교 내에 있던 인쇄실인 보성사(普成社)이기 때문이다. 당시 보성학교는 전동에 있었는데 이후 1927년 혜화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보성학교와 더불어 많은 학교들이 혜화에 자리를 잡게 된다.      


 1915년에는 불교계 민족운동의 거점이었던 중앙학림이 개교한다. 지금의 혜화초등학교 자리에는 ‘사립숭정보통학교’, 아남아파트의 자리에는 ‘경성고등상업학교’,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의 자리에는 ‘백동수도원 숭공학교’, ‘소의학교’, ‘동성상업학교’가 있었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중앙학림’도 이 시기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 근처에 자리했다.     


 1989년 보성학교는 송파구로 다시 교정을 옮기게 된다. 이후 90년대 초, 중앙학림 자리에는 ‘혜화전문학교’와 ‘동국대학교’가 세워진다. 그리고 사립숭정보통학교에는 ‘혜화초등학교’가 세워진다. 경성고등상업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서울여자의과대학’이, 동성상업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동성 중·고등학교’가 자리한다. 이 시기부터 혜화초등학교와 같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익숙한 학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90년대 후반에는 혜화초등학교 자리에 잠시 혜화여고가 들어온다. 그리고 ‘경신학교’가 새로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서울여자의과대학 자리에는 ‘우석대학교’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병원’이 자리한다.  

    

 시간이 흘러 다시 몇몇 학교들이 사라진 후, 현재는 대부분의 학교들이 더 이상의 큰 변화 없이 우리 마을에서 터를 잡고 함께 살아가고 있다. 혜화초등학교를 비롯해 서울과학고등학교, 서울국제고등학교, 경신중·고등학교, 동성중·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등 많은 학교들이 마을에 자리하게 되었다.


현재 혜화·명륜 성곽마을의 학교(출처: 서울시, 『성곽마을 혜화·명륜권 생활문화기록』, 2016, p32)


 우리 마을에는 근대부터 현대까지 많은 학교가 자리해왔다. 성균관이라는 최고의 교육기관과 함께해온 반촌으로서의 정체성이 여전히 여러 학교들, 학생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유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혜화·명륜 성곽마을은 학생들과 함께 생동하며 살아온 마을이다. 앞으로도 마을과 학교가 끈끈하게 연결되며 항상 생명력 넘치는 우리 마을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박보연 돌레지기)


※ 참고자료

혜화동 유쾌한 동행, 『혜화동 마을이야기』, 2015

서울시, 『성곽마을 혜화·명륜권 생활문화기록』,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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