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 어그로를 넘어선 루머에 기반을 둔 마녀사냥
아시안컵 실패로 불거진 국내 축구계의 가장 큰 문제점을 꼽으라면 일부 넷상 트롤들은 선수들을 욕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클린스만 전 감독을 꼽는다. 조금 더 관심 깊게 바라본 자들은 정몽규 축구협회장을 거론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손가락질의 주 대상이 된 것 같다.
정몽규 회장이 한국 축구계에 병을 들여왔다면, 우리나라 언론사들은 이 병을 대놓고 옮기고 다니고 있다.
간략한 배경 소개를 하자면, 현재 한국은 몇몇 축구선수 사이에 발생했던 갈등 관련한 스토리로 뜨겁게 달궈져 있다. 축구계를 넘어 빠르게 사회적 이슈가 되어가고 있는 이번 사건은 신기하게도 영국의 “The Sun”에서 처음 보도되었다. 미디어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The Sun”은 영국에서 쓰레기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 유사언론 (tabloid)으로, 각종 해외 커뮤니티에서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이름이란 뜻으로 “The S*n”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런 “미디어”가 어떻게 가장 먼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내부 사정에 대해 보도를 하게 되었을까 의문이 많다. 가짜 뉴스 제조로 유명한 “The S*n”의 보도를 선수를 보호해야 할 축구협회에서 부인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겠지만, 축구협회는 재빠르게 인정하고 일정 시간 동안 연락두절이 되었다. 이 이상으로 말을 하면 나도 확인되지 않은 루머를 확산하게 되는 것이니 자제하겠다.
해당 갈등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뿐. 그 자리에 없었던 필자, 독자, 국내 언론사 및 대다수의 국민들이 아는 팩트와 이게 팩트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몇몇 선수들 간 갈등이 있었다 -> 축구협회 및 선수들이 인정
2. 이강인 선수와 손흥민 선수가 이 갈등에 포함돼 있었다 -> 이강인 선수의 공개 사과
3. 손흥민 선수가 몸싸움의 여파 손가락 부상을 입었다 -> 다음 경기에 테이핑 된 손가락
정확히 어떤 이유 때문에 갈등이 있었는지, 어떤 선수들이 관련되어 있는지, 정확히 어떤 몸싸움이 있었는지, 손흥민 선수가 손가락을 다친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현재 국가대표 선수 혹은 스태프일 것이다.
인터넷을 보면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 및 스태프가 수십만 명은 되는 것 같다.
국내 메이저 언론사들은 이 이슈를 어떻게 보도하고 있을까?
"탁구를 쳐? 화난 손흥민!...고참들이 이강인 명단 제외 요청까지!"- KBS 스포츠
"'주먹질까지' 이강인 SNS 비난쇄도..클린스만-축구협회에도 성난 팬심" - KBS 스포츠
""손흥민 멱살, 이강인 주먹질" 불화설 일파만파‥"물타기" 반발도" - MBC
"축구 대표팀 내 92파, 96파, MZ파 따로 놀았다…클린스만 몰랐다면 무능? 알았다면 무책임?" - SBS
가장 영향력 및 공신력이 있어야 하는 3개의 지상파 채널만 해도 루머를 기정사실화 해버림을 확인할 수 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에서 활발한 유사언론 및 가십 크리에이터들이 올린 게시물은 취급도 하지 않았지만,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다. 지상파 언론만 봐도 아예 없는 얘기를 지어내 고참 선수들을 악담하는 KBS, 확인되지 않은 얘기로 마녀사냥에 불을 붙이는 MBC, 인터넷 루머를 사실처럼 보도하는 SBS... 한심하기 짝이 없다. 요즘은 clickbait이 곧 비즈니스 모델이라 하지만, 선을 너무 넘지 않았나.
직접 인스타그램에 사과문을 올리고 팀원들이 공개적으로 감싸주지 않을 정도면, 이강인 선수도 분명 잘못이 꽤 클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축구선수들도 인간이라 완벽한 존재들이 아닌데, 우리는 그들에게 완벽함을 요구하는 것 같다. 어느 집단에서 불화는 생기고, 스트레스가 많은 상황에서 싸움도 날 수 있다. 물론 신체적으로 과한 싸움이면 잘못된 것이지만, 계속 말하듯 아직 아무도 디테일을 모르지 않는가. 스포츠계에서 다툼은 허구한 날 일어나고, 그만큼 화해도 하면서 더욱더 돈독해지는 게 팀이다. 어느 팀 스포츠든 팬이라면 아는 사실이다. 이 일이 뭐가 그리 유별나고 대단하다고 한 선수가 이 정도로 마녀사냥을 당해야 하나? 이 상황 자체가 참 우습다. 불화는 패배와 직접적인 요인이 있을 수 있겠으나, 여론은 이강인 선수를 대표팀에서 배제해야 한다, 입국금지 시켜야 한다는 등, 수준 낮은 사고방식으로 기울어져버렸다.
2024년에서 당연한 현상이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절의 팩트체킹도 없이 자극적인 헤드라인만 받아들인 채 이미 결론을 지어버린 것 같다. 이렇게 선수들과 국민들 간의 신뢰가 무너지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협회는 체면 살리기에 바쁘고, 언론은 조회수 늘리기 바쁘고 (물론 언론이 한국 축구를 위할 마음을 가질 의무는 없긴 하다), 선수들은 상황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도를 넘는 비난을 들어야 한다. 얼마나 어이없고 협회 및 "팬"들이 원망스러울까?
필자도, 당신도, 기자들도 그날 일어났던 일에 대해 정확히 모른다. 요즘 자주 쓰이는 말이 있는데, 모르면 중립기어 박고 지켜보면 된다. 그렇게 일상생활에 불만이 많아서 누군가에게 익명의 힘을 빌려 욕을 하고 싶으면, 사실이 다 드러난 후 욕을 해도 늦지 않는데 말이다.
어느 상황이든, 대상이 누구든, 해프닝에 대한 헤드라인을 보게 될 때, 공인을 욕할 에너지의 반 만 팩트체킹에 투자한다면 세상은 더욱더 아름다운 곳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