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 카페를 나오면서 목적지를 자꾸만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이렇게 불안했던가? 차라리 피시방에 들어가 휘황찬란한 빛이 나는 기계식 키보드라도 치고 싶다. 놀이공원 같은 키보드를 치면 적어도 우울을 담은 글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보도블록을 하나하나 밟으며 생각을 넓혀갔다. 어디로 가지?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나는 어디로 가고 있지? 내 전공은 교육학이다. 애초에 오고 싶던 곳은 아니었다. 가고 싶던 곳도 아니었고, 하고 싶던 일도 아니었다. 세상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은 적다지만, 그래도 나는 멍청하고 어리게 행복을 찾고 싶었다.
얼마 전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과 <끝나지 않는 노래>를 읽었다. 사실 후자는 읽는 중이지만, 나는 이미 읽는 내내 주인공 '두자'에게 동화되어 가고 있다. 두자와 나의 삶, 1900년대 초반 여성의 삶과 현재 나의 삶. 여성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두자와 나의 삶. 우리는 똑같이 부모에게 맞았던가? 우리는 똑같이 부모에게 돈을 바쳐야 했던가? 우리는 똑같이, 부모가 우리의 행복을 빌어주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나는 두자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것이 바로 문학을 읽으며 자기 스스로의 삶을 위안하는 자들의 특징이다. 문학은 그런 역할을 한다. 대개 자기만족을 채우고 쾌락을 선물하는 웹소설과 달리 문학은 삶을 위로한다. 때로는 독자를 우울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그 우울조차 선물이다. 삶의 어쩔 수 없는 우울을 문학은 진득하게 내민다. 작중 두자는 결국 시집살이에서 도망친다. 그리고 현재의 나는 집에 들어가기를 미루고 있다.
내게 있어 집은 단 한 번도 쉬는 공간이 아니었다. 언제나 불안과 두려움의 공간이었으며 그 불안은 자는 동안에도 반복됐다. 언제나 나는 모든 곳에서 긴장을 하며 살았다. 어린 시절 솜털까지 오소소 돋아올라 긴장으로 밤을 보내는 곳이 바로 곰팡이가 핀 내 방이었다. 외벽으로 찬바람이 쌩쌩 들어오고 가을만 되면 모기가 몇십 마리씩 날아드는 나의 방. 매일같이 전기 파리채에서는 탄내가 났고 이불에서는 나의 바디워시 냄새만 났다. 나의 방은 완벽한 나의 공간이었지만 가끔 거실에서는 물건이 날아다녔다. 그곳은 좀 불안한 곳이었다.
그곳은 무너지는 곳이었다. 세상은 이따금 무너진다. 조각조각 갈라지는 퍼즐 조각처럼 우리 집의 거실은 잘 끼워 맞춰야 하는 장소였다. 말도 끼워 맞추고 기분도 끼워 맞춰야 하는 그런 장소였다. 생각도 끼워 맞추고 눈치도 끼워 맞춰야 하는 곳이 바로 우리 집의 거실이었다.
나는 마음의 고향은 있으나 물질적으로 몸을 안착할 집은 단 한 곳밖에 없다. 그러므로 내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는 다시 불안의 장소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몸에 긴장을 싣고 추락할 것을 알면서도 전진하는 타이타닉호처럼, 나는 그렇게 집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추락하는 타이타닉호처럼.
그렇게 걸어가는 길이 행복이었나? 확실하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쓰는 글은 행복이었나? 이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매일 긍정적으로 끝맺던 수필은 모두 거짓이었나? 나는 거짓으로 글을 쓰고 있었나? 오직 글로만은 진실을 말하겠다던 나의 진심은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나? 아니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감정이 뒤바뀐다. 어느 순간에는 진심으로 삶의 축복을 느끼다가, 어느 순간에는 삶의 지겨운 지린내를 맡고 도망치기 일쑤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삶의 독한 냄새를 맡으면 나는 내가 썼던 축복의 글을 오만과 기만이라고 느낀다. 어쩌면 나는 두 개의 자아 속에서 매일을 싸워가는 것이다. 지독하게, 질리도록, 지겹게.
그래서 나는 카페로 도망쳤다. 우연히 보내준 친구의 카페 기프티콘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이번 글은 긍정적인 결말을 낼 생각이 없다. 지금의 나는 축복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일에 대한 기대도, 미래에 대한 설계도 존재하지 않는 나의 회로에서 나는 온오프 스위치만을 깜빡이며 제자리에 서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따금 긍정적인 결말로 오만한 말을 지껄였듯이. 그리고 그런 나를 가차 없이 부정하듯이.
오늘의 나는 도망칠 것이다. 저 먼 곳으로. 또 강변으로. 어쩌면 개천으로 도망칠 것이다.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오늘의 나는 도피하기로 스스로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