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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Dec 28. 2022

하늘색 크리스마스 캐럴

god 콘서트와 크리스마스 유령

  이번 크리스마스는 참 특별했다. 이혼 후 다시 싱글이 되어 맞이하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이기도 하지만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god 콘서트 가기! 나는 대학교 다닐 때 수강신청도 잘 못했던 똥손 중에 똥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GOD)이 도왔는지 god 콘서트 티켓팅에 성공했다. 좌석이 조금 사이드이긴 했지만 무려 앞에서 셋째 줄, 그것도 연석이었다.


  나와 함께 간 초등학교 동창 K는 콘서트 프로 참석러이다. 올해는 BTS 콘서트도 섭렵했다. 그녀의 권고에 따라 우리는 콘서트 시작보다 3시간 일찍 콘서트장에 도착했다. 바로 하풍봉(하늘색 풍선 봉)을 사기 위해서였다. 꽤 여유롭게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콘서트장은 이미 하늘색 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풍봉 구입 후 god 입간판이 설치되어 있는 포토존 앞에 줄을 섰다.


  내 차례가 오길 기다리며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이 사진 찍는 모습을 보았다. 해바라기 같은 인조 속눈썹, 아주 오랜만에 한 것 같은 어색한 화장, 짙은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눈가 주름. 아이돌 콘서트를 떠올리면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십 대 소녀는 없었다. 간혹 하늘색으로 치장한 엄마 옆에 검은색 패딩을 입은 딸들이 몇 명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포토존서있는 하늘색 엄마들을 보며 나도 함께 설렜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녀들은 현재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어른이 되는 것은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할 일이 더 우선시 되는 것을 의미한다. 독서도 운동도 내가 좋아서 한다지만 잘 생각해보면 자기 계발이라는 순수하지 못한 의도가 있다. 한 동안 나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 속에서 순수하게 내가 좋아했던 것을 잊고 살아왔다. 그런 나에게 god 콘서트는 어른, 엄마, 사회인이라는 역할 이름표를 잠시나마 떼어내주는 제자리표 같았다.


  찰스 디킨슨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 스크루지 영감은 과거,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세 유령과 만난다. 나도 god 콘서트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다.


  콘서트 시작 전에 마주한 god 팬들이 현재의 내 모습을 보여주는 유령이라면, god 콘서트가 시작되고 나서는 과거의 유령을 만난 기분이었다. 음악은 타임머신이니까. 첫 곡인 '촛불하나'의 익숙한 전주는 나를 2000년 겨울로 데려갔다. god 3집 테이프(cd 아니고 음원 아님)를 사기 위해 '신나라 레코드' 가게 앞에서 기다리던 나, 그 테이프를 마이마이에 넣고 음악을 들으며 공부하던 나, 가요대상을 수상한 오빠들처럼 나도 1등 할 거라며 열심히 공부했던 나, 경희대 포스트모던음악학과 다니던 계상 오빠를 만나겠다고 경희대 입학을 꿈꾸던 나. 나에게 god는 언제나 꾸고 싶은 꿈이자 이루고 싶은 꿈이었다. 그러나 '그리운 건 그대일까 그때일까'라는 하상욱 시인의 처럼, 어쩌면 내가 진짜 그리웠던 것은 그때의 나인지도 모르겠다.


  콘서트는 어느덧 2시간을 훌쩍 넘었다. 오빠들은 큐시트상 마지막 곡인 '하늘색 약속'을 부른 뒤 무대 아래로 사라졌다. 깜깜한 어둠 속 무대 위에 설치된 'god' 세 글자에 불빛 깜빡거렸다. 팬들은 거의 쉰 목소리로 연신 "god"를 외쳤다. 5분쯤 흘렀을까. 우리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마법의 노래 '하늘색 풍선'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앵콜 공연이 시작된 것이다. god 멤버들은 무대가 아닌 2층 관객석 사이사이에서 나타났다. 그러다 중앙에 기다랗게 설치된 무대 위로 한 명씩 올라왔는데, 나의 계상 오빠는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그는 결국 노래가 끝나기 전까지 무대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 덕에 나는 오빠 얼굴을 가까이서 보는 행운을 얻었지만 말이다. ㅋㅋ


  콘서트가 막바지에 이를수록 오빠들의 체력도 끝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냉동인간 마냥 거의 변함없는 외모와는 달리 오빠들도 나이를 먹은 티가 났다. 그것도 많이!! 가사 까먹기, 박자 놓치기, 안무 실수, 연속 3곡 부르고 무대에 드러눕기, 본인들의 실수를 인정하는 넉살까지, 연륜에서 나오는 여유로움이랄까.


  그건 아마 나의 미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나도 오빠들과 함께 늙어가고 있으니까. 그러나 세월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늘어난 나이만큼 오빠들은 더 성숙해졌다. 특히, 올해 54세(내년엔 만 나이로 53세)인 쭈니 의 마지막 멘트는 내 맘 속에 깊이 남아 뿌리내렸다.


  "여러분 요즘 참 힘들죠? 지금도 이렇게 마스크 쓰고 공연 보는 게 어디 쉬워요? 우리가 아무리 향수 많이 뿌려도 여러분이 맡을 수 있는 건 자기 숨 냄새 밖에 없잖아. 뭔지 알지? 살다 보면 힘든 게 참 많아요. 근데 지나고 보면 결국 그게 추억이 되는 거더라고. 우리도 데뷔하기 전까지 얼마나 힘든 일이 많았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거 하나하나가 다 그립고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얘깃거리가 되더라고."


  스크루지 영감은 크리스마스 유령들을 만나고 180도 변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god 콘서트를 갔다 온 후의 나도 달라졌다. 육아, 일, 돈, 인간관계 고민 때문에 뻣뻣하던 내가 좀 말랑말랑하고 유들유들해졌다. 지나고 보니 모두 소중한 추억이 된 과거, 중요해 보이는 일에 치여 진짜 중요한 나를 잃어버린 건 아닌지 돌아본 현재, 체력은 약해져도 좀 더 성숙하고 연해질 미래가 보였다.


  우리매일을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조금씩 죽어가고 있기도 하다. 나에게 얼마의 시간이 남았는지는 모르겠다.  시간 동안 나는 많은 것을 가지기보다는 최대한 많이 경험하고 싶다.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추억을 많이 쌓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god 콘서트는 정말 값진 경험이었다. 미래의 내가 음악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여행할 때, 쉽게 도착할 수 있는 하나의 인덱스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영롱하고 아름다운 자태의 하풍봉(3시간 쓰고 당근 마켓에 올려 담날 콘서트 가시는 분께 팔았다. 나는 주부니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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