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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호 Apr 21. 2023

오프 더 브레인

몸이 분주하지 않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아니랍니다.

완전히 무너진 나의 생활패턴을 서서히 찾기 시작한 건 회사를 쉰 지 4주 만이었다. 나의 컨디션이 100% 다 돌아왔다고 하긴 힘들지만 길고 긴 수면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좀처럼 넘어가지 않던 음식도 조금씩 소화되기 시작했다.


보통의 우울증 환자들은 불면증을 동반한다고 하는데 나의 경우에는 과다수면하는 케이스였다. 보통 수면시간이 7-8시간이었던 나는 10시간 이상씩 꼬박꼬박 자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자도 자도 몸은 피곤함과 무기력함을 계속해서 느꼈다. 그냥 이 현실을 잊고 싶고 더 이상은 버틸 힘이 없어 눈을 감는 쪽을 택했던 것 같다. “그리 대단한 인생도 아닌 평범한 인생인데 사는 게 어느 순간 숙제처럼 느껴지고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힘들고 방황하는 것일까. 답도 없는 수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어느 날 아버지가 고사리를 따러 가자고 제안을 하였다. 컨디션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던 나로서는 몸에 무리가 되지 않을까 고민을 했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먼저 산을 타는 것이 제일 문제였다. 예전부터 등산하는 것이라면 자신 있던 나였지만 몸이 이 지경이 되고 나서 첫 등반이라 여러모로 걱정이 되었다. 그때 마침 예전에 일하면서 친해진 친구가 천주산이라는 곳을 등산하러 가보지 않겠냐고 연락이 왔다. 그곳은 진달래로 유명한 산으로 지금 진달래를 볼 수 있으니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같이 가자는 이야기였다. 이런 식으로 예상치 못하게 나를 챙겨주는 사람들을 마주하면 나는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리고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항상 즐거웠으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천주산을 등반하기 시작하였고 역시나 등산을 하는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나는 '다람쥐'라는 별명에 무색하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였고 2달 만에 처음으로 온몸이 흠뻑 젖을 정도로 운동을 한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그간 있었던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며 겨우 정상에 올랐다.


그런데 등반을 하면서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말로는 분명 진달래가 만개했다고 예쁘더라고 전해줬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우리가 정상에 다다를수록 다 져버린 진달래뿐이었다. 진달래는 피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꽃을 피우고 나면 지는 건 순식간이라고 한다. 그래서 만개한 진달래를 보기 위해서는 그 순간 그곳을 가야만 한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우리가 실망할까 하얀 거짓말을 해준 사람들이 고맙기는 했지만 우리가 마주한 건 이미 다 저버린 진달래뿐이라 허탈하기도 한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 바쁘다는 이유로 더 나은 미래를 만든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이유들로 소중한 것은 뒤로 미루진 않았는지. 나에게 무한한 시간이 있다고 착각하고 산 건 아닌지. 때로는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내가 보내는 지금 이 시간들이 내 인생의 실패나 패배라 생각하여 좌절하지 말기를. 잠시 쉬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를. 다시 일어나서 또 힘차게 달려갈 수 있는 휴식의 여정이기를.”


그리고 며칠 뒤 아버지와 함께 고사리를 따기 위하여 산을 타기 시작하였다. 천주산을 한번 등반하고 와서였을까 생각보다 나의 몸은 잘 버텼고 그렇게 산 능선을 따라 계곡을 따라 한참 걸어갔다.

걸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중 이 병에 걸리고 나서 깨달은 것은 사람이 생각보다 머리로 하는 일이 많다는 사실과 그나마 나에게 남은 에너지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생활하기 위해 버티는 용도로 사용했단 사실이었다. 보고서 하나를 쓰기 위하여 공부한 많은 자료와 그 자료를 정리해서 나만의 언어로 출력하는 과정들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작업들이었다. 등산과 고사리 채취와 같이 현재 내 몸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나는 이건 힘든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 세뇌했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직장인들이 느끼듯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의 하루는 종일 바빴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나는 무엇을 했는지 당장의 결과물이 없다고 느꼈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마음만 조급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을 향해 산을 등반하는 것처럼 산에서 딴 고사리를 깔끔하게 손질하는 것처럼 시간을 들인 만큼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있었다면 좀 더 보람 됐을까? "


하지만 당장의 결과물이 없다 하여도 우리의 머리는 지금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으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을 머리가 처리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는 생각하지 말기를. 오늘도 열심히 버틴 자기 자신에게 격려해 주기를.


그렇게 묵묵히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다 보니 거짓말처럼 고사리가 자라고 있었고 그곳에서 오랜만에 아버지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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