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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마이 Dec 04. 2022

코가 길어지니까 거짓말을 해라!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리뷰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Pinocchio, 2022)

미국/117분/애니메이션

감독 : 기예르모 델토로

출연 : 이완 맥그리거, 틸다 스윈튼, 핀 울프하드, 케이트 블란쳇 외





계속되는 "판의 미로"


파시스트 정권하의 청소년이 겪는 아픔과 성장을 그려낸 <판의 미로>는 여전히 기예르모 델토로의 대표작으로 언제나 손꼽히곤 한다. 그 당시 (적어도 한국에서는) 숱한 아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던 그의 잔혹동화, 이번엔 완전히 전면에 '동화'를 내세워 한 층 더 깊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듯하다.



이번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역시 파시스트 정권 하의 청소년이 역경과 고난을 겪으며 성장한다. 아니, 정확히는 그 시대상으로 인해 카를로라는 청소년은 목숨을 읽는다. 그리고 그 아들을 대체한다는,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기괴하고 소름 돋는 생각을 통해 만취한 제페토는 무섭게 나무를 톱질하며 자신의 욕망의 결정체인 '피노키오'를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피노키오는 파시스트를 배우지 않은 '순수함'을 상징하며 그에 따라 정권의 탄압을 받는다. 


<판의 미로>의 비달 대위는 <피노키오>의 볼페 백작이 되어 그 정권의 앞잡이를 상징하고, 두 청소년은 모험의 주체가 되어 정권에 대항한다. 감독의 취향이 잔뜩 들어간 요정과 귀뚜라미, 그리고 스핑크스의 형상을 한 크리처들 역시 두 영화가 공유하는 지점일 것이다. 또한 <판의 미로>의 신전을 연상케 하는 푸른 요정의 자매가 사는 곳 등등, 여전히 <판의 미로>가 주는 교훈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고, 다시 말해 여전히 세상은 뼈아픈 반성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어른이 된 아이들과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들



볼페 백작의 아들 캔들윅은 파시스트의 훌륭한 전투원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는 캔들윅의 바람이 아니다. 그는 그저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어리고 여린 아이일 뿐이다. 그 지점은 ‘색깔 없는’ 피노키오라는 독특한 존재로 인해 발현되어 결국 캔들윅은 자신에게 그토록 거대했던 백작에게 페인트 볼을 발사하기에 이른다. 결국 파시스트의 앞장섰던 볼페 백작은 포탄에 맞아 숨을 거두고 만다.



스파자투라는 포데스타에게 ‘구출’되어 노예 생활을 하는 원숭이이다. 그 역시 자신을 구해준 사람은 포데스타뿐이라 굳게 믿고 있을 터, 모질게 매를 맞고 죽을 위기에 처해도 포데스타에 대한 굳은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 또한 ‘피노키오’라는 존재를 통해 포데스타와 본인에 대한 관계를 명확히 깨닫고 피노키오를 죽을 위기에서 구함과 동시에 강한 파시스트인 포데스타를 죽인다. 



파시스트인 볼페 백작과 포데스타는, 어쩌면 ‘어른’이기에 파시스트의 길을 택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캔들윅과 스파자투라는, ‘아이’이기에 파시스트가 되어야 하는가? 이 불공평한 어른과 아이의 관계는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 보인다. ‘보호자’이기에 ‘보호’받지 못함을 이야기할 수 없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피노키오를 통해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네 사상, 내 사상



피노키오의 존재는 참으로 기이하다. 자신의 아들의 대체품으로서, 피노키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평생 아버지를 ‘외롭게 하지 않게 하라’는 푸른 요정의 명령에 따라 피노키오는 태어났다. 이 잔혹한 출생의 이유를 넘어서, 제페토는 피노키오에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은 채 그를 가두기까지 한다. 교회에 간 피노키오는 사탄이 들렸다며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한다. 예수 앞에 이 얼마나 불경한 일일 것인가! 그러나 동시에 볼페 백작은 그 사탄을 훌륭한 전투원으로 바라본다. 불사의 몸을 가진 피노키오를 이용해 나라를 위해 싸우라 강요한다. 나아가 파시스트라는 정권하에 몸담고 있으나, 가장 자본주의적인 모습을 띠는 포데스타는 피노키오를 훌륭한 자본으로 본다. 



이토록 기이하고 황당한 피노키오를 향한 수많은 잣대들은 피노키오에게 단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피노키오는 그저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한다. 지금도 누군가는 말한다. 자식은 부모를 봉양해야 해, 하나님을 믿어야만 해, 나라에 충성해야 해, 많은 부를 쌓아야만 해, 그 모든 삶의 기준들을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어떨 것 같은가? 피노키오는 제페토에게 묻는다. 저 예수 목상도 나무고 나도 나무인데, 어째서 사람들은 저 나무는 좋아하면서 나는 싫어하느냐고 말이다.














잔혹동화 피노키오




어린 시절 ‘피노키오’ 이야기를 들으며 얻게 되는 교훈은 무엇이었는가? 정말 명료하고도 단순했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니, 거짓말하면 나쁜 어린이라는 이야기였다.(아무도 태어나자마자 제페토를 봉양해야 하는 피노키오의 아픔에는 집중하지 않았다.) 그러나 <피노키오>에서는 피노키오의 거짓말이 등장인물들을 죽음에서 구출한다.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부추기고 거짓말을 하라 힘껏 소리친다. 캔들윅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한 삶을 그만두겠다 소리치고, 스파자투라는 더 이상 당신의 노예를 하지 않겠다 소리친다. 피노키오는 아이들을 표현하고 소리치게 만든다. 이제 피노키오가 주는 교훈은 달라져야 하고, 달라진 것이다. 모든 ‘짐’이 되는 아이들에게 하고자 하는 말인 것이다.



기예르모 델토로 감독의 애정이 듬뿍 담긴 것이 보이는 등장인물들의 외형과, 기예르모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문화 중 하나로 보이는 ‘서커스’ 역시 그의 취향대로 꾸며졌다. 제페토가 피노키오를 만들기 위해 톱질을 하고 못을 박는 모습, 처음 피노키오가 생겨나 움직이는 그 그로테스크한 관절 꺾기는 정말이지 일품이다. 우리의 동화는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더 이상 그 그림자를 회피하고 무시하는 것은 모두를 위한 일이 아님을 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어쩌면 우리의 동화는 <판의 미로>와 <피노키오>와 같은 잔혹동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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